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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 아이는 마침내 그동안 대기를 걸어두었던 무상 보육기관에 한 자리 얻어 들어갔다. 월화수목, 9시부터 3시까지. 덕분에 아이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었고, 나는 없는 살림에 돈 걱정 없이 아이를 맡겨두고 내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물론 그래도 매일 바쁘고 힘들긴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아이와 버스를 타고 한 시간씩 걸려 등하원 하는 일이 워낙 고됐다. 그 겨울을 다 지나고 나니 도저히 다음 겨울은 이렇게는 안되겠다 싶었던 우리는 지난 4, 결국 고심 끝에 중고차를 한 대 마련했다. 그래서 4월 말부턴 아이 통학에 쓰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 아직 면허가 없는 나를 위해 남편이 아이 통학을 맡아주니 일주일에 이삼일은 혼자 집에 머물며 몇 시간을 온전히 쓸 수도 있었다. 비록 지금은 방학이라 다시 별 감흥 없이 지내지만, 이제 곧 다가올 개학이 기대된다. 드디어, 나의 육아 인생에도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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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티가 그린 우리 세 식구의 봄. 위에 얼굴 모양을 한 채 동동 떠다니는 것들은, 나비 세 마리.>

 

그 귀한 시간을, 나는 결코 집안 청소를 하거나 반찬을 만드는데 쓰지 않는다. 우리 집 약속 2번에 번듯이 쓰여 있듯, 가사는 고루 나누어야 하는 법. 청소나 요리 등 집안일은 가급적 아이와 남편 모두 집에 있을 때 함께 하고, 하루에 통으로 몇 시간씩 여유가 생기는 날은 꼭 나를 위해 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되는 조용한 집에서, 아이가 읽어달라며 들이미는 너덜너덜해진 그림책이 아니라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아이가 건네주는 소꿉놀이 잔에 담긴 가상의 커피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바닐라 향 커피를 마시며, 아이가 좋아하는 노래가 아니라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아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뉴스, 다큐, 강연 영상을 보는 데 그 시간을 다 바친다. , 이 얼마나 바라던 시간이었던가!

 

이렇게 살만하다, 여기는 때가 많아진 5년차 엄마이지만, 솔직히 결혼이나 육아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여성이 주변에 있다면 그 생각에 공감하며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싶다. 아니, 오히려 안 하는 게 앞으로의 인생에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짐짓 한마디 보태며 그 마음을 더욱 부추겨 주고 싶다. 마음 맞는 사람과의 결혼생활이 만족스럽고 행복한 것과는 별개로, 남편의 상황에 발 묶여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기 일쑤인 이 결혼 제도에서 여성은 언제나 약자다. 박사과정 입학에 실패한 건 나였으니 나는 결혼이 아니었더라면 미국 땅을 밟지도 못했을 테지만, 바로 그 기혼여성이라는 신분이 이곳에서의 내 생활에 방해요소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우리처럼 부부 중 한 사람이 유학생으로 해외에 체류하는 경우, 배우자는 학생 당사자의 비자 조건에 종속되기 때문에 활동상에 많은 제약을 받는다. 공부를 하기엔 경제적으로 전혀 여유가 없고, 취업을 하자면 상당한 금액의 돈을 내고 허가서를 받은 다음에야 구직활동을 할 수 있는데 허가서를 받는다고 취직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실제로 5년 전, 여기 도착하자마자 허가서를 받고 50군데 넘게 지원해봤지만 결국 취업엔 실패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현지 사정을 좀 더 알고 또 필요한 자격을 조금 더 갖추긴 했지만, 그래봐야 나는 이 동네에선 이방인. 최저임금 받는 시급직 밖에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니 지금 다시 허가서를 신청하기엔 부담이 된다.        

 

결혼도 결혼이지만, 임신/출산/육아에 들어서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아무리 아이가 예쁘고 좋아도, 또 나처럼 그 덕에 새로운 적성(!)을 발견하게 되어도 임신/출산/육아를 경험하는 여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심신이 피폐해지는 시기가 찾아오기 마련. 그 피폐함을 덜어줄 사회적 장치가 전무한 상황이라면 임신/출산/육아는 더더욱 권하고 싶지 않다. 타국에서, 그것도 육아 조건이 열악하기로 유명한 미국에서 단 둘이 하는 육아이긴 해도 우리는 비록 없는 살림이지만 마음에 여유라도 갖고 산다. 집안일 잘 하고 육아를 함께 할 의지와 실행력을 갖춘 남편이 있고, 가정에 충실한 것을 미덕으로 아는 사람을 지도교수로 둔 덕에 남편은 가사와 육아에 충분한 시간을 쓸 수 있다. 아이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녀도 맘충소리 들을 일 없고, 헬스장 놀이시설에 아이를 맡겨놓고 운동도 할 수 있고, 양질의 무상보육 기관도 비교적 가까이에 있다. 여기 상황이 엄청나게 좋은 것도 아닌데, 아니 실은 겨우 최악을 면하고 있을 뿐인데, 한국의 지인들에게서 간간이 진짜 독박육아 이야기를 듣다 보면 괜스레 미안해진다. 야근과 출장이 잦은 남편, 가사와 육아의 극히 일부만을 보조하는 남편 때문에 일하면서도 아이를 챙기는 것은 늘 엄마 몫인 곳에서 여성은 집에서는 물론이고 동네 산책길, 직장, 심지어 국가에서도 두들겨대는 동네북 신세가 되어버리기 일쑤이니, 어찌 여성들이 결혼 안 하겠다, 아이 안 낳겠다 선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여성=결혼해서 가사를 하며 애 낳고 키울 사람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공공연하게 퍼져 있는 사회에서, 아이를 기르기에 우호적인 문화도, 제도도 갖춰져 있지 않은 사회에서, 결혼과 출산, 육아는 여성 스스로 파고 들어가는 무덤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이른바 결혼적령기,’ ‘출산적령기에 있는 여성들에게 결혼하라고, 아이를 낳으라고 부추기거나 간섭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전히 여성들에게 결혼과 출산을 권장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센 모양이다. 뭐 그건 한국 사람들이 대체로 정이 많아서’ (라고 쓰고 오지랖이 넓어서라고 읽는다) 남의 일에 이러쿵 저러쿵 하는 일이 많은 탓이라고 하자. 하지만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전적으로 자유롭게, 주체적으로 행해져야 할 결혼과 출산에 대해 왜 제 3자가, 그것도 국가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가다. 결혼이든 출산이든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건데 왜 국가가 결혼 하고 싶다는 사람들은 동성이라는 이유로 못 하게 막아서거나 방해하거나 심지어 반대하고, 결혼 하기 싫다는 사람들을 붙들고 강요를 하는지 정말 이해불가다.


결혼과 출산/육아에 친화적인 제도와 문화를 당장 만들어내기 어렵다면, 여성들이 결혼하지 않을 자유, 출산/육아 하지 않을 자유라도 충분히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결혼을 했고, 육아를 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도 제법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 육아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서 결혼과 출산/육아를 낭만적으로, 포장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 것도 사람 봐 가며, 사정 봐 가며 해야 하는 거다. 모든 사람들이 꼭 결혼을 해야 할 이유도, 결혼=출산/육아여야 할 이유도 없다. 결혼 없이 연애/동거만으로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임신/출산하지 않고도 생명을 길러내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경로는 다양하다. 출산율이 낮아서 정말로 국가의 미래가 걱정된다면, 원하는 사람들이 언제고 원할 때 결혼하고 원할 때, 원하는 만큼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면 될 일이다. ‘가임기 여성이니 결혼시장 이탈계층이니 하는 괴상한 말을 만들어 여성을 국가의 미래 인력 생산 기계로나 간주하는 국가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은 여성의 사랑과 결혼, 임신과 육아에 대해 그토록 선택자유를 강조했나 보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백 년도 더 전인 1911년의 이야기라는 것이 한편으론 놀랍고 다른 한편으론 한숨이 난다. 결혼이, 출산과 육아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도 여성이 국가의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결혼시장, 임신/출산/육아에 내몰려야 한다는 건 좀 너무하다. 사랑의 결과로 결혼을 선택하고도 불행해지는 이들을, 우리는 엠마 골드만의 백여년 전 텍스트 바깥, 지금 바로 이곳에서 여전히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결혼, 출산, 육아로 경력이 단절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사회적 존재로서는 물론이고 개인적인 존재로서도 설 자리를 잃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엠마 골드만은 이렇게 썼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여성을 남성에게 기생하는 존재, 절대적으로 남성에게 의존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결혼은 여성이 스스로 갈등을 해결할 능력을 없애버리고, 여성의 사회적 의식을 지워버리고, 여성의 상상력을 마비시킨 다음, 여성을 기꺼이 보호해주겠노라 나선다. 그건 보호가 아니라 덫이다. 여성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조롱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살고 있는 2017년의 나이지만, 1911년 이른바 자유연애주의자가 쓴 이 대목에 동의하지 않기는 쉽지 않다. 엠마 골드만의 짧은 책을 읽으며 몇 번이고 줄을 긋고 되돌아가서 곱씹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어느새 이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들어와 있지만, 그래서 이 제도가 구획 지어 놓은 범위 안에서 내 삶을 최대한 충만하게 가꾸고자 애쓰고 있지만, 부인할 수는 없다. 결혼이 여성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또 이성과 결혼한 여성, 게다가 아이가 있는 여성으로서의 내 삶이 그 자체로 누군가에겐 하나의 기득권, 특권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도. 그래서 나는 지지한다. 다른 이들의 결혼하지 않을 자유, 아이를 낳지 않을 자유를. 그리고 생각해본다. 누구나 원할 때, 원하는 사람과 살며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아이를 낳고 혹은 아이를 낳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이다. 그러자면 우선, 여성과 결혼에 대한 관점, 출산과 양육과 가사 등 돌봄 노동을 바라보는 인식부터 바꾸어나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더욱 <정치하는엄마들>의 활동에 기대를 걸게 된다. 결혼이란 게 무엇인지, 엄마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채 알기도 전에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된, 혹은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길 원해도 되지 않은/못한 사람들, 그래서 외롭고 괴롭고 아픈 날들을 온 몸으로 직접 겪어낸 사람들이 모였으니 분명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그 변화는, 함께 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더 빨리, 더 거세게 일어날 수 있을거라고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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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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