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교육

매 맞으며 한 영어, 스스로 한 영어

김민식 2017. 07. 11
조회수 1892 추천수 0
512.jpg » 유아 시기부터 영어를 공부하는 요즘 아이들의 모습.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의 저자 김민식 피디는 어학 공부는 가만히 수업을 듣는다고 해서 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이의 동기나 흥미를 고려한 영어 교육이 필요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올해 초에 낸 책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에서 저는 회화 문장을 외우면 누구나 쉽게 영어로 말을 할 수 있다고 썼어요. 그것을 보고 초등학생 아이에게 회화 책을 외우게 하는 부모님도 있더군요. 책을 쓸 때, 제가 염두에 둔 독자는 ‘30~40대 직장인’이었어요. 십 년 넘게 영어를 공부했지만, 아직도 회화가 서툰 분들이요. 이분들은 학교에서 영어 문법과 단어는 충분히 공부했기에 능동적 표현의 양만 늘리면 영어 회화가 술술 나오거든요.

제 책을 읽고 ‘비싼 영어 사교육 대신 집에서 홈스쿨링 해보자’고 하시면 아이가 많이 힘들어할 겁니다. 영어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초등학생은 스펠링을 몰라 책을 외우기는커녕 읽기도 버겁고요. 영어 단어나 문법에 익숙한 중고생들은 가뜩이나 입시 준비로 바쁜데 영어 회화까지 외우라니 괴로울 것입니다. 아이들이 이럴까봐 걱정이에요. “아, 그 아저씨는 드라마 피디가 그냥 드라마나 만들지, 무슨 영어 학습서를 써서 사람을 이렇게 괴롭히나?”

저는 영어 알파벳도 모르던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에 중학교 1학년 영어 교과서를 통째로 외웠습니다. 그걸 보고 “피디님은 하셨잖아요?”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네, 저는 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수학 선행학습 같은 사교육이 없었기에 방학 동안 하루 종일 영어책만 외웠거든요. 외우지 못한 날에는 아버지에게 맞았어요. 아버지는 한번 매를 들면, 분이 풀릴 때까지 때리시는 분입니다. 하루는 그렇게 맞다가는 맞아 죽을 것 같아서 도망갔습니다. 다음부터는 팬티 바람으로 매를 맞았어요. 아예 도망가지 못하게. 맞아 죽는 것과 쪽팔려 죽는 것 사이에서 고민도 했지만 맞아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나 봐요. 팬티 바람으로 도망간 적은 없었거든요.

중학교 올라가서 영어 성적은 항상 100점이었어요. 교과서를 다 외웠으니 따로 공부할 필요도 없었지요.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성적이 계속 떨어졌어요. 맞으며 공부했다는 설움에 영어가 싫어지더라고요. 대학 2학년 때 영어 성적은 D+였어요. 나중에 군대 가서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나이 스물에 인생이 우울한 건 아버지 탓인데, 나이 마흔에 인생이 우울하면 그때도 아버지 탓일까? 우울한 인생을 바꾸기 위해서 스무살의 내가 무언가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닐까? 결국 공부는 자발성이 관건입니다.

고등학생이 된 큰딸에게 이제껏 공부하라는 말을 단 한 차례도 한 적이 없어요. 억지로 시키면 더 하기 싫은 게 공부더라고요. 특히 어학 공부는 멍하니 수업만 듣는다고 늘지 않아요. 능동적으로 말하기를 연습해야 하는데요, 영어 조기교육의 가성비가 떨어지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자발적인 공부를 위해 동기부여가 중요합니다. 엄마 아빠가 취미 삼아 영어문장을 외우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어요. 부모가 영어 회화를 공부하면서 외국 문화에 관심을 갖고 기회가 되면 국외여행도 즐기는 모습, 그것이 아이들에게 있어 최고의 동기부여 아닐까요? 

김민식 문화방송 피디 seinfeld6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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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식
SF 애호가 겸 번역가, 시트콤 덕후 겸 연출가, 드라마 매니아 겸 감독, 현재는 책벌레 겸 작가. 놀이를 직업으로 만드는 사람. 아이들의 미래도 놀이에 있다고 믿는 날라리 아빠.
이메일 : seinfeld6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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