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tachImage_217534573.jpg



내 꺼 한 자루, 두 아이 꺼 각각 한 자루씩 세 자루의 연필을 깎는 동안 내 엄마의 뭉툭한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떠올랐습니다.
몇 주 전, 부모님과 다녀온 제주도 여행사진을 들춰보다 문득 사진 속 엄마의 오른손이 온통 왼손으로 덮여 있거나 가려져 있다는 걸 알았어요. 20대 초반, 사고로 잘려나간 엄지손가락이 나에게나 별 거 아닌 일이었지 엄마에겐 늘 감추고 싶고 아픈 기억이었던 것이지요. 언젠가 베이비트리에 엄마의 손가락에 대해 글을 쓴 적도 있었는데, 그걸 이제야 눈치챘다니...

어린 시절, 엄마는 무엇이든 뚝딱 만들었습니다.

종이 박스에 꽃무늬 벽지를 발라 근사한 책꽂이를 만들었고, 문에 창호지를 바를 땐 미리 따둔 꽃잎을 넣어 햇살이 비칠 때마다 은은한 꽃 그림자가 지게 했어요. 여름날 식재료라고는 밭에서 나는 채소, 지난 겨울에 담근 김치뿐이었지만 하루는 호박전, 하루는 깻잎전, 하루는 신김치와 고추가 들어간 칼칼한 수제비. 엄마 손을 거치면 소박한 밥상은 금방 윤기가 돌았어요.  


특히 엄마 손이 마법 같다는 생각을 했던 건 바로 연필을 깎을 때였습니다.
왼손 엄지로 칼날을 쓱쓱 밀고 당길 때마다 끝이 살짝 휘어진 나무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졌고 저는 그걸 주워 부러뜨리며 놀았어요. 매끄럽고 날카롭게 잘 깎인 연필들을 필통에 가지런히 넣을 때의 희열이란! 글씨 쓰는 것,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건 엄마의 연필깎기 마법을 구경하는 재미에서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 굉장히 마음에 드는 새하얀 연필깎기를 샀습니다. 글자와 그림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여섯 살 큰 딸에게 줄 선물이었는데 당분간 꺼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에게는 연필 깍는 즐거움을, 아이에겐 엄마가 깎아준 연필로 사각사각 글자를 새기는 즐거움을 선물하고 싶어서요. 그런데 엄마, 그때 엄마도 지금 나처럼 즐거웠나요?


* 마지막 질문에 대한 엄마의 답변 :)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의 행복이란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첨부
안정숙
2012년 첫째 아이 임신, 출산과 함께 경력단절녀-프리랜서-계약직 워킹맘-전업주부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 중이다. 남편과 1인 출판사를 꾸리고 서울을 떠나 화순에 거주했던 2년 간 한겨레 베이비트리에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 일기’를 연재했다. ‘아이가 자란다 어른도 자란다’를 통해 아이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7년 겨울, 세 아이 엄마가 된다. 저서로는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이 있다.
이메일 : elisabethahn@naver.com      
블로그 : http://blog.naver.com/elisabethahn
홈페이지 : http://plug.hani.co.kr/heroajs81

최신글

엮인글 :
http://babytree.hani.co.kr/31731303/b38/trackback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
» [자유글] [엄마와 글쓰기] 연필깎는 즐거움 imagefile 안정숙 2017-07-10 751
3199 [책읽는부모] 인디고 서원에서 학부모세미나 '열두 달 작은 강의'를 엽니다 indigo2828 2017-07-08 419
3198 [책읽는부모] 김밥은 왜 김밥이 되었을까? image wls0486 2017-07-03 551
3197 [책읽는부모] [책읽는부모11기]김밥은 왜 김밥이 되었을까~? [1] hawoo7 2017-07-02 495
3196 [책읽는부모] 김밥은 왜 김밥이 되었을까? 를 읽고 돼지김밥 놀이를 하고;;; ^^ imagefile singri4 2017-06-30 579
3195 [직장맘] 누워 있는 아빠. 5분만... 애잔하다. imagefile [2] 강모씨 2017-06-30 633
3194 [책읽는부모] 김밥은 왜 김밥이 되었을까...를 읽고 sunhwaone 2017-06-29 483
3193 [자유글] [아빠의 평등육아 일기] 긴 머리 소년의 마음근육 imagefile [2] ???? 2017-06-29 1815
3192 [책읽는부모] <서평>돼지김밥 편식예방 보드게임 imagefile newturn1986 2017-06-29 486
3191 [자유글] 오늘은 피곤함이 너무.. bupaman 2017-06-28 349
3190 [건강] 여름을준비하는현명한방법'7월생활단식'접수중입니다-수수팥떡가족사랑연대 image okemos 2017-06-28 401
3189 [책읽는부모] [서평] 돼지김밥 보드게임 & 김밥은 왜 김밥이 되었을까? imagefile [1] octhy24 2017-06-27 626
3188 [자유글] 아침부터 습한게 느껴지네요. bupaman 2017-06-27 312
3187 [자유글] 디퓨저 향이 괜찮네요. bupaman 2017-06-23 432
3186 [자유글] [엄마와 글쓰기] 내가 나로 살 수 있도록 imagefile [5] 시에나 2017-06-23 843
3185 [자유글] [엄마와 글쓰기] 아이셋 엄마, 아이넷 엄마 imagefile [2] 윤영희 2017-06-22 886
3184 [자유글] [엄마와 글쓰기] 너는 밥에 김치 나는 김밥 imagefile [4] 안정숙 2017-06-22 965
3183 [자유글] 점점 더워지는 것 같아요.. bupaman 2017-06-22 368
3182 [자유글] 목이 계속 뻐근하네요. bupaman 2017-06-21 342
3181 [건강] 내몸에주는 최고의휴식 '건강단식캠프' 접수중입니다-[수수팥떡가족사랑연대] image okemos 2017-06-19 3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