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웰다잉 강의를 하러
다엘과 함께 지방에 내려갔다.


‘죽음을 다룰 때 실패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죽음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말로 강의를 시작하면서
직면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북웰다잉.jpg » 다엘이 찍어 준 웰다잉 강의 사진

 

자살 주제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하던 중
오래 전 교직 생활 때 겪은 일이 생각 났다.

 

내가 담임했던 한 학생이 고3이 되어 찾아온 적이 있다.
견디기 힘든 일이 있어 자살을 하려고
동네 약국을 돌며 수면제를 모았다는 것이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나를 만나려고 왔단다.

 

내 머리 속에서 생각이 빠르게 돌아갔다.
성급히 말을 꺼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 죽을 때 죽더라도 얘기 좀 하자.”
근처 호프집에 데려가서 맥주를 시켜놓고 사연을 들었다.
진로 문제로 아버지와 갈등을 빚고 있는데
말이 안 통하고 길이 안 보이니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자세히 기억이 안 난다.
맥주잔을 앞에 놓고 앉았던 호프집,
어둑한 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와
아이의 표정만 뚜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런데 수면제는 얼마나 모았어? 한 번 보여줄래?”
내 말에 아이가 탁자 위에 올려 놓은 수면제 봉지는 제법 두둑했다.
나는 슬금슬금 약봉지를 끌어 당기며 말했다.
“이거 내가 보관해도 될까?
좀더 생각해보고 필요하면 다시 와. 그때 돌려줄게.”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의 눈에 안도감이 비쳤다고 생각된 건
내 감정의 투사인지 실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이후 아이는 무사히 졸업을 했고 내 기억에서 잊혀졌다.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학 졸업 후 결혼하여 아내와 딸과 함께
그야말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자살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과 이면의 역설을 생각해 본다.
흔한 조언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죽을 용기로 살아야지.
자살도 일종의 살인이니 용서 받을 수 없어.
그만한 일로 죽는다면 나는 백 번도 더 죽었겠다!
자살하면 죽어서도 편치 못하고 천벌을 받을 거야.’
이런 말에 담긴 생각들은
죽음을 숙고하는 유명인사들의 주장에서도 가끔 찾아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잘 알려진 분이 죽음에 대해 쓴 책이 있다.
그 책을 읽던 중 한 대목에서 눈길이 멈췄다.

 

영화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자살을 생각하고 온 중년 남성이 있었다고 했다.
혹시라도 살아야 할 이유를 영화에서 찾고자 했다는 거다.
감독이 그에게 해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자살을 시도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의 임사체험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말은 끔찍한 암흑세계였다며,
좀더 힘을 내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다.
이야기 내내 그 남성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고
더 대화하려 했으나 황급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는 일화였다.

 

나는 감독에게 긴 메일을 보냈다.
내가 썼던 메일의 일부를 옮겨본다.


‘자살시도자의 임사체험이 부정적인 것은
죽음에 임하는 시점의 압도적인 죄책감과 절망이 반영된 것이라고
저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살이 아닌 일반적 임사체험에도 부정적 사례들은 있을 수 있고,
이는 연구자들의 의도에 맞지 않기에
공론의 장에서 제외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 또한 듭니다.
자살이 '잘못된 행동'이자 '더 큰 고통을 불러오는 실수'라는 말은
자살을 실제로 생각하는 이를 오히려 더 큰 절망에 빠뜨려 마음의 문을 닫게 하고
더 이상 외부의 도움을 구하지 않게 되어 역설적으로 자살을 부추길 수 있다는 게
자살 관련 전문가들의 기본 매뉴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자살에 대해 쉽게 단언할 수 없는 건,
노무현 전대통령 사례와 같이 '사회적 타살'의 성격을 띠는 경우나
어느 학자의 말처럼 '돌봄 받지 못한 질병사'와 같은 측면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며칠 후 답메일이 도착했다.
관련자료를 더 상세히 연구해서
보다 배려 깊은 접근을 하도록 노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죽음을 얘기할 때는 수많은 역설이 존재하며
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죽음 논의의 핵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감독 우디 앨런은 인터뷰에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묻는 기자에게 답했다.
“저는 늘 말해왔지만, 죽음에 적극 반대합니다.”

 

죽음에 반대한다는 그의 말이 익살이라는 건 누구나 안다.
그런데도 자살을 생각하는 이에게
우리는 섣불리 죽음에 반대한다고 외치고 있는 건 아닐까?

 

강의를 마치고 다엘과 함께 돌아오는 버스 안
어두운 창 밖을 보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깃든 생명이
연결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의 생명이 당신의 생명과 별개가 아니라는 생각은
내게 깊은 안도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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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딸이 뇌종양으로 숨진 후 다시 비혼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입양하여 달콤쌉싸름한 육아 중이다. 공교육 교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시민단체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의 상담원이자 웰다잉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지역의 입양가족 모임에서 우리 사회의 입양편견을 없애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초등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대안교육 현장의 진한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이메일 : juin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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