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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6월과 수국.

이 셋은
엄마가 된 뒤로
내 삶에서 아주 중요한 낱말들이 되었다.
6월생인 딸아이의 생일 사진을
해마다 수국 꽃을 배경으로 찍어온 지, 15년째.

올해가 다른 해에 비해 좀 더 의미있었던 건,
동네 수국 꽃밭이나
남의 집 담장 너머로 핀 수국을 배경으로 찍어오던 기념사진을
우리집 마당에서 처음으로 찍게 된 것이다.
손바닥 크기만한 수국 모종을 몇 년 전에 사 와서
심고 정성들여 키웠는데,
올해는 3월부터 파릇파릇 새잎이 왕성하게 나기 시작해
아, 올해는 드디어 소담스런 수국 꽃들을 볼 수 있는 걸까. 싶어
6월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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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가 되자,
커다란 잎 속에서 수국 꽃망울이 몽글몽글 피워오르는 게 보였다.
여기저기 솟아오른 크고 작은 꽃망울을 세워보니, 무려 10송이나...
식물을 키우면서 얻는 보람과 즐거움이 가장 큰 때는
바로 이런 순간이다.

활짝 만개한 꽃을 볼 때보다, 이렇게 꽃이 시작되는 순간을
지켜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
다 자란 아이를 보는 것보다,
아이가 성장하는 순간순간을 곁에서 지켜보는 뿌듯함과 사랑스러움,
더 자라지 않고 여기서 딱 멈춰도 좋겠다
싶은 그런 마음이 식물을 키울 때도 느끼게 된다.

딸 육아와 꽃을 연관시킬 때마다 어김없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제목도 배우 이름도 정말 지우개로 지운 듯 싹 잊어버렸지만,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나는 딱 한 장면이 있다.
주인공 여성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말하는 대사였는데,

"내가 어렸을 때, 내 방 벽지를 고르라고 해서
활짝 핀 큰 꽃무늬가 그려진 걸 골랐더니
엄마는 아주 작은 꽃봉오리가 잔잔히 박힌 무늬를 골라주며,
'지금 너에겐 이게 더 잘 어울린단다' 그러셨어."

예전에 영화를 볼 땐, 그런가보다.. 하며 봤던 그 장면이
딸을 키우면서 두고두고 생각이 나곤 하는데...
작고 여린 꽃봉오리같은 아이의 순수함, 그때만 간직할 수 있는 아름다움,
활짝 피기까지 아직 남은 성장의 순간들, 수많은 가능성, 기대 ..
영화 속 엄마는 그런 마음과 이미지를
벽지 하나 고르는 데까지 섬세하게 신경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어른이 된 여자 주인공은
그제서야 어린 시절 엄마와 나누었던 따뜻한 시간들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긴다.
그리고 그 시절 딸을 향한 섬세했던 엄마의 마음이
힘들고 어려운 지금의 자신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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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색 꽃망울이 올망졸망했던 마당의 수국은
5월이 지나면서 점점 꽃답게 변해갔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 때마다, 오늘은 또 얼마나 피었나
빨래 널 때마다  '너무 빨리 피려 하지말고 천천히 해..' 하며 말을 걸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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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 되면서 이젠 정말 본격적인 수국의 자태.
수국은 흙이 산성인가, 알카리성인가에 따라 꽃 색깔이 달라지는데
처음엔 흰색처럼 피더니 결국 파란 색으로 피어났다.

건강하게 잘 자란 아이를 볼 때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꽃.
둔하기 그지없는 남편마저 감탄하게 하는 수국 꽃.
늘 남이 키우고 가꾼 꽃 모습만 구경하다
내 손으로 직접 키워 알게 되었을 때의 기쁨,
올 6월은 정말 특별한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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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봐도 예쁘고
뒤에서 봐도 예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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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내려다봐도 예쁜...
뭐, 자식이 그렇지 않나.
어느 각도에서 봐도 내 아이가 이쁘게 느껴지는 건
그 아이의 생명 모든 부분에 나의 피, 땀, 눈물이 더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올해는 딸아이의 수국 배경의 생일사진을 멀리가지 않고,
집 마당에서 찍어주었다.
정작 수국 스토리의 주인공인 딸은,
요즘 학교생활이 너무 바뻐
수국이 피었는지 어쨌는지 크게 관심도 없다.

그래, 그 나이엔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게 맞는거지.
제목도 모를 영화 속의 그 여주인공처럼
어른이 되어서야 지금 이 시절의 의미을 떠올릴 때가 오겠지.
어쩌면 육아는,
엄마가 제멋대로 편집하는 스토리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15년 동안 이어온
딸과 6월과 수국 스토리가 꽤 근사하다고 여겼는데,
이것도 어디까지나 엄마만의 착각인지도;;

그랬거나 어쨌거나
6월에 딸을 낳지 않았으면
수국이란 꽃도 나와 인연이 없는 채로 평생 살았을지 모를 일.
내 내면의 서랍장에 수국과 연관된 긴 이야기 서랍이 하나 생겼으니
그것만으로도 뿌듯하다.
아기자기한 스토리가 많은 육아일수록
아이 키우는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지않을까.

휴.. 이렇게 올해도 큰아이의 생일이 지났다.
늘 그랬듯이 수국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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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현재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어린이식당 운동’활동가로 일하며, 계간 <창비어린이>에 일본통신원으로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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