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꽃.jpg

 

토독..

소리가 들렸다.

감꽃 떨어지는 소리다.

앞마당에서 뒷마당으로 이어지는 작은 길가 모퉁이엔 크고 오래된 감나무가 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나무 가득 손톱만한 노랗고 이쁜 감꽃들이 가득 달린다.

그 꽃들이 후두둑 떨어져내리는 것이다.

비처럼 한꺼번에 우두두두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문득 문득

떨어지는데 그때마다 수도를 덮어놓은 나무 덮개 위에, 아이들 창가에

달아놓은 플라스틱 차양 위로 토독.. 하는 소리가 들린다.

가볍지만 분명한 존재감을 가진 소리..

어느날 밤에 나는 감나무 앞에 있는 딸들 방에 누워 아이들과 함께

감꽃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엄마.. 조용히해보세요.. 아! 저 소리!! 들었어요?"

 

아이들은 어둠 속에서 툭 하는 소리가 들릴때마다 이불속에서

숨죽여 웃었다.

감꽃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는 밤이라니, 너무 근사하지 않냐고

나도, 아이들도 좋아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던 밤 이었다.

 

아파트를 떠나 마당 있는 집으로 와서 제일 달라진 것을 들라면

단연코 '소리'다. 아파트에 살때는 몰랐던 수많은 소리들이 있었다.

아침이면 닭 우는 소리가 먼저 들린다. 이윽고 귀에 들어오는 수많은

새소리들...

딸들이 좋아하는 새는 '쯔위 쯔위' 울고, '히히 호호' 우는 새도 있고

'고르륵 고르륵'거리는 새도 있다.

소쩍새가 울고, 뻐꾹새가 울고, 딱따구리가 부리로 나무를 쪼아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드믈지만 꿩이 한번씩 질러대는 외마디  소리가 들릴때가 있다.

딱딱 소리를 내는 딱새도 있고, 요란하게 내지르는 직박구리도 있고

몰려다니며 날개소리를 내는 오목눈이도 있다.

온갖 이름모를 새소리들이 천지에 가득하다.

 

바람이 불면 남편이 처마 밑에 달아 놓은 풍경이 잘그랑 잘그랑 소리를 낸다.

현관 앞에 달아놓은 덧문에 쳐 놓은 비닐들이 우우 거리기도 한다.

꽃들이 피기 시작하면 사방에서 들려오는 날벌레 소리는 또 어떤가.

지금 감나무 아래 서면 온 마을에 있는 날개달린 벌레들은 모두

모여 있는 것 처럼 엄청나게 소란스런 날갯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작은 꽃 한송이마다 날벌레 한마리씩 부지런히 드나들고 있다.

 

마당에서 사는 복실이와 해태가 움직이는 소리, 짖는 소리가 들리고

저 아래 보리밥 집 큰 개 '마루'와 '평상'이가 짖어대는 소리도 들린다.

우리집 지붕 근처에서 사는 길냥이가 우는 소리가 들릴때도 있고

닭장 앞에서 얼씬거리는 길냥이를 보고 닭들이 놀라서 한바탕 야단을

하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우체부 아저씨 오토바이 소리, 늦은 밤 남편의 차가 언덕길을

올라와 마당에 깔린 작은 돌위를 지나 멈추는 소리는 반갑다.

창문을 열고 있으면 집 아래 골목길을 지나는 길손들의 두런두런

이야기 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저녁이면 벌써 요란해지는 개구리 소리, 그 가운데 드믈게

들리는 맹꽁이 소리도 있다. 분명 개구리 소리와는 다른 소리들이

섞여서 들려온다.

 

비라도 오면 소리는 말할 수 없이 풍성해진다.

지붕과 차양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다르고, 빗물받이 통으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또 다르다. 마당으로 떨어지는 소리과

보도블럭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다르고, 수련 항아리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도 다르다.

 

큰 소리, 작은 소리, 맑은 소리, 여린 소리, 둔한 소리, 신기한 소리

그리고 정다운 소리, 이쁜 소리들이 사방에서 들려온다.

혼자 있어도 내가 있는 세상은 온통 풍성한 소리들이 가득하다.

이 집에서는 매일 귀가 깨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감꽃 떨어지는 소리같은 것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래된 집이어서 창문이 허술한것이 안과 밖의 경계를 더

유연하게 해준다.

소음과 바람을 완전히 차단해준다는 시스템 창호였다면

문을 닫는 순간 밖의 소리와는 차단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낡은 집은 사방에서 새어드는 바람과 소리가

온 집안을 드나든다.

'토토로'에서 사쯔끼와 메이가 사는 그 크고 낡은 집처럼

큰 바람이라도 불면 거실을 지나가는 바람의 뒷모습까지

보일 것 같은 집이다.

 

감꽃2.jpg

 

새로 떨어진 감꽃 몇개 주우려고 오솔길에 나가 보았다.

작은 길 위는 온통 감꽃으로 덮여 있다.

떫고 싱그러운 냄새가 가득하다.

그 순간 또 토독 하고 감꽃 하나 떨어진다.

작고 여리지만 아주 또렷한 소리 하나가 마음 속으로 선명하게 들어온다.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수런거린다.

부지런한 날벌레들이 쉬지도 않고 꽃 사이를 오가고 있다.

내가 숨 쉬는 소리가 내 귀에 또렷하다.

 

소리.. 소리... 소리들...

 

가만히 서서 나를 감싸는 세상의 소리를, 자연의 소리를, 모든것이 움직이며

내는 그 한없는 소리들을 듣고 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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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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