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도 무사히 끝나고.

새 대통령이 취임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날마다 뉴스면을 채우는 훈훈한 사진들에 두 눈을 의심하게 된다.

대통령이 어느 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사인받으려는 어린이가 종이와 연필을 꺼내느라 가방을 뒤적이는 동안

함께 앉아 할아버지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과

까까머리를 한 남자아이의 뒷모습이 얼마나 이뻐보이던지.

사진 속의 사람들 모두가 웃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도한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 참 재밌었는데,

'기사를 읽고도 페이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웃고있는 나'

라는 글을 읽으며,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싶었다.


아! 이제 조금 마음놓고 이쁜 그림도 보고, 좋은 음악도 듣고

그렇게 살아도 될까.

잘한 일에는 칭찬과 격려를, 잘 못한 일에는 객관적인 비판과 조언을,

국민 모두와 언론이 앞으로도 잘 지켜보며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자기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 나갔으면 한다.



크기변환_DSCN7733.JPG


그럼, 우리는 이쁜 그림보러 잠시 미술관 나들이 가볼까?

모두들, 에릭 칼이란 그림책 작가를 좋아하시는지?

이름은 잘 몰라도 <배고픈 애벌레>라는 그림책은 알고있을 것이다.

작은 애벌레 한 마리가 세상에 태어나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먹고,

나비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원색의 그림으로 표현한 <배고픈 애벌레>.

전세계의 베스트셀러인 이 그림책은 곧 출간 50주년을 코앞에 두고 있다.


도쿄에 있는 세타가야 미술관에서는 올 봄과 여름에 걸쳐,

이 <배고픈 애벌레>의 작가, 에릭 칼의 원화전시회가 열리고 있는데

일본도 황금연휴 기간이었던 5월 초, 이 미술관으로 가족나들이를 다녀왔다.


크기변환_DSCN7738.JPG

아이들을 위한 포토존에 에릭 칼의 그림을 응용한 벽 장식이 귀여웠는데
초록과 빨강색의 저 애벌레 캐릭터는 아기들의 이미지랑 어찌나 잘 맞는지.
귀엽고 귀엽고 또 귀여울 따름이다.
20년 전쯤에 한창 그림책 공부를 할 때,
에릭 칼이(그때도 할아버지였다) 그림책 작업을 하는 과정을 담은
비디오를 본 적이 있다.
각각의 종이에 다양한 원색들을 덧칠해 두고, 그것들을 한 조각씩 오리거나 잘라
종이에 다시 붙여서 그림을 완성해가는 콜라주 기법이었다.
하얀 수염의 할아버지 작가가 의사처럼 하얀 가운 같은 걸 입고
하나의 놀이처럼 쓱쓱싹싹 그림을 완성해 내는데,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의 작업이 너무 쉽고 재밌어 보여,
아이들을 키우면서 여러 번 해 봤는데 이게 막상 해보면 정말 어렵다.
어울리는 색들을 배열하고 조화시키는 것도 힘들고
무엇보다 적당한 형태로 자르고 다듬는 게 정말 손따로, 마음따로가 되고 만다.

완성된 에릭 칼의 무수한 그림책들을 보면
그냥 즐겁게 놀이를 한 느낌, 자유로움,
자연과 동식물, 곤충들과 아이들의 사랑스러움,
그 모든 게 너무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보고있으면 그냥 좋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런 느낌이 많이 들었는데, 전시회를 쭉 보다보니
실제로 에릭 칼은 모차르트를 좋아해서, <마술피리>였나? 그 오페라의
무대미술을 담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모차르트가 아마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면, 에릭 칼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50년동안 어마어마한 다작을 한 그의 수많은 그림책의 원화들을
보고 눈호강을 실컷 한 전시회였다.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에서도 어떤 그림책 작가가 한때 좋아지기도 했다가,
또 그런 관심이 다른 작가에게 옮겨가기도 하는데
한결같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에릭 칼의 그림은
그만큼 쉽고, 단순하고, 재밌고, 아름답기 때문이 아닐까.
<배고픈 애벌레>는 50년 전이 아닌, 지금 출판되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세련된 작품이다.
새삼 놀라웠다.

크기변환_DSCN7734.JPG

이날, 10살 아들을 데리고 간 우리 부부에게
긴 감상의 여유 따위가 주어질 리 만무하다.
아들의 재촉으로 전시실은 다시 재입장하기로 하고 점심먹으러 식당으로.

도쿄 세타가야 미술관은 레스토랑이 맛있기로도 유명하다.
크고 아름다운 공원 내에 있는 미술관이라
식사를 하면서 큰 유리밖으로 보이는 초록 공원이 근사해
주말이면 이름을 쓰고 줄을 서야 들어가서 먹을 수 있는 곳인데
성격이 급한 아들 덕분?에 우리 가족은 11시 반에 벌써 점심을 먹게 되었다.
오늘 이 식당의 추천메뉴는 바질 소스의 스테이크.
오랜만의 칼과 포크에
긴장과 침묵이 흐르는 우리 가족.

크기변환_DSCN7735.JPG

레스토랑 메뉴 중엔 에릭 칼의 전시회에 맞춰
그림책 이미지를 요리에 반영한 <에릭 칼 특별메뉴>가 있었다.
원색이 다채로운 샐러드, 붉은 토마토 스프, 햄버그스테이크, 달님 디저트 ..
세트 가격이 원화로 28,000원.
이 메뉴를 뚫어져라 보고있는 엄마를 향해 아들이 묻는다.
"엄마, 이건 뭐야? 나 이거 먹을래요."
"응??  아냐.. 이거 그냥 전시회 포스터야."
(남편) ㅋㅋㅋㅋㅋ

크기변환_DSCN7752.JPG

아들 덕에 밥도 빨리, 배불리 먹고 식당을 나오니
전시실 재입장을 아들은 거부했다.
아까 다 봤는데 뭘 또 보냐고.
그래? 그럼 산책이나 좀 할까.

하고, 나간 미술관 옆 공원.
온통 초록으로 둘러싸인 숲 속 정글짐을 단숨에 올라가는 아들.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하게 웃는다.
그러고 보니, 아들은 미술관 안에서는 저렇게 웃고 있지 않았다.
그 모습이 너무 이뻐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는데
아! 진짜 그림은 여기 바깥에 있었네!
천재 작가가 그린 그림도 아름답지만,
어떤 그림보다 어떤 그림책 캐릭터보다
실제 살아있는 자연과 아이들이 더 싱그럽고 아름답다.

20분만 걸을까 하고 나왔던 공원 산책이었는데
더 빨리 나오지 않은게 아쉬웠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이왕 거기까지 갔는데 전시실을 좀 더 보았으면..
아이도 좋은 그림을 좀 더 집중해서 봐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는데.

며칠 전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에서 미술수업이 있었던 모양인지,
입고 간 티셔츠에 온통 물감을 묻혀 돌아와 '아이고 이게 뭐야?!' 했더니
아들은 씩 웃으면서,
"에릭 칼 할아버지같죠?" 그런다.

응? 어디가? 그랬더니,
"왜, 원화전시회에 갔을 때 에릭 칼 할아버지가 입었던 옷 있었잖아요."
그제서야 아..
어두운 전시실 한 켠에 물감 범벅이 된
에릭 칼의 그림 작업복이 걸려있던 걸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저 스쳐지나가듯 보고말았던 그 옷을 아이는 인상깊게 보았던 모양이다.

아들들은 미술관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무것도 보지않는 건 아니라는 것.
또 하나 배우게 된 에릭 칼 전시회였다.
아이키우기의 배움의 끝은 과연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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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현재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어린이식당 운동’활동가로 일하며, 계간 <창비어린이>에 일본통신원으로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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