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연휴, 해남 땅끝마을 템플 스테이에 참석했다.
황사와 미세먼지가 전국을 뒤덮었지만
절을 둘러싼 녹음은 싱싱한 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조용한 휴식이 목적이었는데
다엘은 달랐다.
만나는 사람들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대하면서,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는 다양한 덕담을 듣고 온 것이다.

 

첫날, 암자의 흥겨운 음악회에 참여하고
깜깜한 숲길을 걸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
다엘이 대뜸 말했다.
“난 아빠가 없어도 괜찮아.”
암자의 스님이 다엘의 손을 잡고 ‘이 아이가 내 상좌’라면서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등 따뜻한 관심을 보이자
그간의 외로웠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 같았다.

 

낯선 곳에 가면 처음에는 무척 긴장하지만
익숙해질수록 사람 좋아하는 다엘의 심성은 그대로 드러났다.
절과 암자를 돌아보는 것 외에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나와 달리,
다엘은 템플 스테이의 진행자, 참석자들과 함께
툇마루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즐거워했다.

 

식사를 위해 들른 공양간에서
아주머니가 다엘에게 국을 먹지 않는다고 짐짓 혼을 내자,
다엘은 얼굴이 굳어지더니 급기야 울먹이면서 감자국을 먹기 시작했다.
당황한 아주머니는 다음날 다엘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여러 칭찬과 함께 누룽지와 초콜릿을 수북이 챙겨주셨다.
누룽지를 받아 든 다엘의 입이 함지박만해진 건 물론이다.

 

마지막 날, 교통편 시간을 맞추기 위해 서두르는데
갑자기 스님 한 분이 말을 걸었다.
“잠깐 차 한 잔 하고 가세요.”
버스 시간 때문에 안 될 것 같다고 하니
정류장까지 태워주신다는 거였다.
스님은 올해 첫 찻잎으로 끓인 차를 권하면서
다엘이 붙임성 있고 해맑아서 보기 드문 아이라고 풍성한 덕담을 해주셨다.
다음에 오면 절의 어른인 회주 스님을

다엘이 꼭 뵐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KTX를 타고 귀가하는 길에도 다엘의 부지런한 발걸음은 계속됐다.
승무원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열차 내부 탐색을 시작한 것이다.
집에 도착했을 때 다엘의 손에는 선물이 가득했다.
KTX 승무원이 준 쿠키와 아몬드,
템플 스테이 팀장이 건넨 연꽃 장식품,
공양간 아주머니의 누룽지와 초콜릿,
암자의 스님과 함께 딴 찻잎을 쪄서 빚어낸 떡차까지.

 

temple1.jpg » 스님과 함께 찻잎을 따고 있는 다엘

아빠가 없어도 된다고 했던 자신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후 다엘은 아빠 후보 리스트를 나열하곤 했다.
절에서 만났던 스님들을 아빠 목록에 올리다가
왜 나만 아빠가 없냐고 투정을 부리기도 하면서
나름의 애도 작업을 하는 것 같았다.

 

육아서적을 보면 소년에게 아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한 대목이 많다.
남자아이에게 아빠는 일상 속 역할 모델이자
성인 남성으로 자라는 데에 있어서
엄마가 대신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극단적으로 해석될 위험성이 있다.
아빠가 없는 소년은 모범적 남성상을 접할 수 있는 경험이 드물고
같은 남자로서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할 기회와
당당한 성인으로 성장할 자신감을 갖기 어렵다는 오해가 그것이다.

 

한편으로 다행인 것은,
현대사회에서 남녀의 역할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모성과 부성에 대해
무한한 사랑을 주는 쪽과 사회 규범을 익히게 하는 쪽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 추세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는 아들로서의 삶을 체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은 남을 수밖에 없다.
아들이 겪을 상대적 박탈감에 애달파 할 수도 있고
나 역시 이에 대한 안타까움은 마음 한 구석에 있다.

 

그러나 안타까움보다 더 큰 것은
아들이 기적처럼 내게 와 준 사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다.
때로 그 외의 결핍과 고통은 사소해 보이기까지 한다.
나의 자족과 아이가 느끼는 결핍은 분명 다른 차원이니
앞으로 다엘의 아픔에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만,
지금의 상황도 충분히 괜찮다는 것을 계속 말해줄 것이다.

 

남자로서의 역할모델이 필요하다면
주변의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워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행히 다엘에겐 특별한 재능이 있다.
사람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과 타고난 사교성.

 

앞으로 다엘이 아빠의 빈 자리를 느낄 때마다
우리 집 가훈을 마음 속에 새겼으면 한다.

 

‘애써 찾지 마라, 이사 갈 때 나온다’

 

상실을 대하는 자세를 염두에 둔 이 가훈을,
언젠가 다엘이 온전하게 이해할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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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딸이 뇌종양으로 숨진 후 다시 비혼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입양하여 달콤쌉싸름한 육아 중이다. 공교육 교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시민단체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의 상담원이자 웰다잉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지역의 입양가족 모임에서 우리 사회의 입양편견을 없애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초등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대안교육 현장의 진한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이메일 : juin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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