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우리 글램핑장 한번 놀러와. 가족들 데리고

, 선배님. 한번 놀러갈게요. 아니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이번 주 토요일에 갈게요

 

며칠 전 선배를 만났고 나는 덜컥 약속을 했다. 인사말로만 한번 갈게요라고 하는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했지만 실제 캠핑장이 궁금하기도 했다. 회사에 잠시 들러 오전 일을 보고 나오려는데 내가 캠핑장을 가는걸 안 동료가 냉장고에 남은 고기와 소시지를 싸주었다. 그래, 역시 캠핑은 고기지.

선배님, 갈 때 뭐 가지고 가야돼요?”, “, 다른 건 다 있으니까. 저녁에 구워먹을 고기만 사와며칠 전 나눈 대화가 떠올라 고기를 꼭 챙겼고 다른 건 칫솔 하나 빼고는 아무것도 가져가질 않았다. 글램핑장 가는 길에 지난주에 식재한 담소요 정원에 들러 아내와 아이들에게 꽃을 보여주고, 가는 길에 가시리 녹산로를 경유하며 유채꽃도 원 없이 감상했다. 간만에 제주 동쪽 나들이라 기분이 들떴다.


봄꽃과 녹음이 잘 어울리는 글램핑장. 앞으로는 말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인디언텐트들 너머로는 갈색빛깔의 그라스로 뒤덮여 있는 오름의 등성이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그래 이 곡선이 바로 제주도지. 농경지가 잘 발달된 제주 서부에서 일하다가 화산지형과 오름, 초지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들이 흔하게 보이는 동쪽에 올 때면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 혹은 멀리 여행을 온 듯 기분이 좋아진다.

 

글램핑장에 도착하여 입실을 하게 되었는데 텐트 안에는 침실과 쇼파, 냉장고와 싱크대, 심지어 욕실까지 있어서 놀랐다. 캠핑 온 건가 호텔 온 건가 구분이 안가는 상황도 잠시, 선배가 옆 텐트의 지인들을 소개해주었고 그 지인분들은 일찌감치 숯에 불을 피우며 고기 구울 준비를 했다.


<아이들의 세줄타기. 몇 번을 떨어지면서도 겁없이 건넜다>

사본 -IMG_1580.jpg



“TV가 없어서 왠지 모르게 심심한 거 같아요평소엔 TV로 드라마 한편도 보지 않는 아내가 왠 일인지 TV이야기를 해서 의아했는데 아이들 데리고 캠핑장을 한 바퀴 돌고 오니 아내가 바닥에 전열기를 틀어놓고 자고 있는게 아닌가. 재택근무 하느라 너무 피곤했나 보다. 3미터 거리도 안 되는 옆 집(?)에선 함께 온 이웃 텐트와 합석하여 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우린 1시간도 안되어 인사를 나눈지라 자연스레 한잔 하고 가셔요소리를 듣게 되었다.

 

아이들끼리는 금방 친하는지 우리 아이들이 옆 텐트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 시작했고 옆 집의 아주머니는 아내 주라고 와인 한잔을 건네게 되는데.. “엄마, 아주머니 텐트 안에서 주무시는데요?”, “.. 그래? 그럼 다시 가져오렴”. 아내가 피곤해서 잠이 든 거였지만 왠지 일찍 잠이든 아내가 신경이 쓰였다.

 

가족끼리 캠핑을 왔는데 아내는 잠이 들었고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놀며, 나 또한 옆집에서 술 한잔 하러 왔다가 에이 그냥 여기서 드세요권유를 받는 상황. 뭔가 이건 아니지 않나 싶어서 우리 집으로 되돌아와서 아빠가 무언가를 할 줄 안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먼저 회사에서 가져온 고기를 꺼내는데.. 고기에서 상한 냄새가 나는게 아닌가. 다른 게 있지 하고 보니 소시지 두 개와 고구마 3, 양파 2개와 당근 1개가 달랑 있었다. 캠핑장내 편의점에 먹을 게 많았는데도 상한 고기를 버리고 나니 머릿속엔 왠지 모든 걸 잃은 것 같이 횡한 기분만이 남았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아빠는 아빠끼리.. 엄마는 엄마끼리. 이것이 캠핑의 묘미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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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 또한 옆집 아빠들처럼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었고 소시지라도 구워야겠다 싶어 칼집을 내고 채소를 썰어 준비를 하는데 해솔이가 옆에서 아빠, 나도 아빠 도울래라며 따라 붙었다. 먹을 거리 준비는 다 되었고 드디어 숯불 화로를 준비하는데.. 화로 안에 거치대가 2개가 있다. 숯불은 과연 작은 거치대 위에 두어야 하나 아니면 아래에 두어야 하나 또다시 머릿속은 횡 해지기 시작하고 옆집에선 한창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대충 숯불을 두고 다시 불을 피우려는데 토치를 한 번도 사용해 본적이 없는지라 왼쪽으로 돌렸다 오른쪽으로 돌렸다 하는데 눈치 없는 해솔이는 큰 소리로 아빠, 아빠 불이 왜 안 나와? 불이 안 나오면 어떻게? 왜 불이 안 나오는 거야? 아빠, 이거 할 줄 몰라?”, “.. 잠시만 기다려봐했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불하나 지피지 못해 쥐구멍에라도 숨어들어 가고 싶은 쪽 팔리는 순간.. 결국 옆집에 합석한 선배에게 도움을 청했고 불을 피웠는데 이상하게 불이 잘 타오르질 않았다. 다시 선배가 우리 텐트로 와서 살펴보니 화로의 공기 구멍은 막혀있고 숯은 거치대 아래에 잘못 두어 불이 잘 타지 않았던 거였다. “불을 피울 때는 말이지..” 선배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데 참 고맙기도 하고 얼굴 붉혀지기도 했다.

 

내가 이러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잘 자고 있고 아이들은 옆집 아이들과 정신없이 놀고 있어서 나 또한 어차피 고기도 없는데하며 슬그머니 옆집 아저씨들과 술자리에 합석하고 나니 왠지 모르게 조금 전 세상 창피한 일은 잊혀지고 편안하게(?) 불토를 달려봐야겠다는 묘한 안정감이 들더라.  밤 11시가 넘어가니 주위가 산인지라 몹시 추워지기 시작했고 결국엔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전기판넬이 깔린 텐트바닥은 침대와 달리 뜨거울 정도로 따뜻했으나 텐트 밖도 아닌 이불 밖은 아직 너무나 추었다. 밤새 뒤척이다 너무 밝아서 일어나보니 아침 8, 아침이 밝았다.


뜨거운 물에 개운하게 샤워하고 나오니 아내가 자기야, 침대에 전기장판이 있는데요라며 놀란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편리한 공간이었으나 우린 불도 못 피웠고 침대 장판의 전원도 켜질 못했다. 캠핑을 여러 번, 글램핑장을 여러 번 다녔던 옆 텐트 아빠는 침낭까지 준비를 했다고 하니 상한 고기만 달랑 챙겨온 나와 참 비교가 많이 되더라.

 

결국 내 첫 캠핑은 이렇게 초라하게 끝이 났지만 우리 가족끼리 함께여서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첫째 둘째가 유난히 좋아한 세줄타기, 아이들과 아침에 걸어본 캠핑장 내 덕천 곶자왈, 철쭉과 유채꽃, 평화로운 마목장 까지.. 소소한 행복이 크게 느껴진 주말, 결코 잊을 수 없는 12일이었다.


<아침에 곶자왈에서 만난 젖소, 아이들이 참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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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욱
세 가지 꿈 중 하나를 이루기 위해 아내를 설득, 제주에 이주한 뽀뇨아빠. 경상도 남자와 전라도 여자가 만든 작품인 뽀뇨, 하나와 알콩달콩 살면서 언젠가 가족끼리 세계여행을 하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현재 제주의 농촌 마을에서 '무릉외갓집'을 운영하며 저서로 '제주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 '제주, 살아보니 어때?'를 출간했다.
이메일 : pporco25@naver.com       트위터 : pponyo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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