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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석 피디의 새 예능프로 <윤식당>을 보다가
문득,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이란 책이 생각났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부엌이다.
그것이 어디에 있든, 어떤 모양이든, 부엌이기만 하면,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장소이기만 하면 나는 고통스럽지 않다.
기능을 잘 살려 오랜 세월 손때가 묻도록 사용한 부엌이라면 더욱 좋다.
뽀송뽀송하게 마른 깨끗한 행주가 몇 장 걸려 있고

하얀 타일이 반짝반짝 빛난다.
구역질이 날 만큼 너저분한 부엌도 끔찍이 좋아한다.
바닥에 채소 부스러기가 널려있고,
실내화 밑창이 새카매질 만큼 더러운 그곳은, 유난스럽게 넓어야 좋다.
한 겨울쯤 무난히 넘길 수 있을 만큼 식료품이 가득 채워진

거대한 냉장고가 우뚝 서 있고,
나는 그 은색 문에 기댄다.
튀긴 기름으로 눅진한 가스 레인지며

녹슨 부엌칼에서 문득 눈을 돌리면,
창 밖에서는 별이 쓸쓸하게 빛난다.



다분히, 감성적 허영이 넘치는 이런 글이 어릴 때는 좋았나 보다.

<윤식당>에 나오는 부엌처럼,

바닥이 타일로 된 이국적인 부엌에서

느긋하게 요리하는 걸 상상하던 시절이 있었다.

벽을 마주보고 있는 아파트 부엌과는 달리,

커다란 창문이 곳곳에 달려있어 설거지를 하다가도 채소를 볶다가도

고개만 들면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는, 그런 부엌을 아직도 꿈꾸곤 한다.


<윤식당>의 부엌은

멍하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런 상상을 충족시켜주는 것 같다.

<카모메식당>이 그랬던 것처럼,

한번쯤 낯선 나라에 가서 넓고 쾌적한 부엌에서 요리를 해 보았으면,

기회가 된다면 작고 예쁜 식당도 한번 열어볼까 하는,

막연하지만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지는 그런 상상을.


그런데, 꿈만 꾸기엔 세상살이에 너무 시달린 나이라 그런가.

뽀사시한 화면 뒤에 숨어있는 현실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현지에서 식당 허가를 받는 게 쉽지 않았을텐데..

조리자격증이나 영업허가과정은 제대로 밟았을까..

아무리 방송이라지만,

저 정도의 준비만으로 덜컥 식당을 시작해도 되나..


실제로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본다면,

이 방송이 그려내는 부엌의 모습은 얼마나 철없는 소꼽장난같을까, 싶다.

17년차 주부인 내가 보기에도

그들의 모습은 너무 어설퍼 보였다.

<윤식당>이란 방송과 <키친>이란 소설에서 그려낸

근사하고 감성적인 풍경의 부엌과는 달리

우리 현실 속의 부엌은 그렇게 아름답지도,

그렇게 설레이지도 않는 공간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부엌은

온갖 정신질환이 발병하는 진원지, 같다는 게

17년차 주부인 나의 솔직한 감정이다.

요리를 아주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식구들의 끼니를 이렇게 오랫동안 매일매일 차리다보니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강박증같은 게 느껴져

신경이 예민해지고 뭔가에 쫒기는 기분이 들곤 한다.


비교적 시간여유가 있거나, 냉장고 속 식재료들로 뭘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이

머릿속에 준비되어 있으면 그래도 괜찮은데

바깥일을 보고 정신없이 돌아온 저녁시간, 배고픈 아이들의 원성은 점점 높아지는데

부엌은 엉망진창에 식사준비를 제로부터 시작해야 할 때면

정말이지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

나도 배가 고파 숨이 넘어갈 지경인데..어쩌라구!


큰아이가 태어난 뒤부터, 그런 저녁시간을 15년째나 보내고 있다.

그냥저냥 수월하게 지나갈 때도 있지만

그래도 늘 쉽지가 않다.

오늘 저녁을 대충 잘 넘기고 나도, 내일 저녁이, 모레 저녁이 또 걱정이다.

우리 사는 게 이런데

<신혼일기> 속의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시골부엌을,

<윤식당> 속의 이국적인 식당부엌을,

또 넋놓고 들여다보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지극히 현실스러운 우리들 부엌의 풍경과

낭만이 자리잡을 틈이 없는 엄마의 마음을 좀 덜어내면

그래도 부엌이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공간이다.

요시모토 바나나가 쓴 글처럼, 구역질이 날 만큼 너저분한 부엌이라 해도

때가 되면 밥 짓는 냄새가 솔솔 나고 국이나 찌개가 보글보글 끓은 풍경은

힘든 일상 속의 유일한 위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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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과 함께 3학년이 된 아들이 어느날,
부엌에서 킁킁, 열심히 무언가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뭐해?"  했더니, 
"음~  좋은 냄새! 엄마, 나는 이 밥 냄새가 날 때가 제일 좋아!"

쌀을 씻어 앉혀둔 밥솥에서 모락모락 연기와 함께 피어오르는 밥냄새를
아들은 눈을 감은 채 오랫동안 맡고 있었다.

엄마가 오랜 세월, 강박증에 시달리는 것과 상관없이
아이들은 날마다 매 끼니마다 이 밥 시간을 기다리고 기대한다.
차리는 게 힘들어도 새학기의 긴장과 피로를
오직 먹는 것에 기대고 있는 두 아이에게,
그래도 우리집 부엌은 <윤식당> 못지않게
분명 아름답고 맛있는 공간일 것이다.

1년 365일 손님이 끊일 날이 없는, 그래서 엄마는 좀 괴롭지만
우리집만의 <윤식당>을 그동안 잘 꾸려왔구나 싶다.
그러고 보면 우리 친정 부엌에도
엄마가 40년이 넘게 꾸려온 <박식당>이 있고,
베이비트리 가족들 각 가정에도 <신식당><안식당><양식당> ...
그 집만의 다양한 식당들이 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가끔이라도 바다가 보이는 이쁜 부엌에서 느긋하게 요리하는 것 같은
마음으로 만든 음식들을 식구들에게 대접하고 싶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마지막으로 이것만 꼭 같이 해봤으면..
하는 걸 떠올리게 되는데, 그건 바로 맛있는 밥 한 끼 함께 먹는 것이었다.
두런두런 이야기나누며 밥 한 끼 맛있게 꼭 한번만 먹었으면.. 하는 바램..
그게 뭐라고 이렇게 사무치도록 아쉬울까.

오늘 저녁 아이들과 함께 먹는 한 끼가
먼 훗날, 두고두고 그리워지는 한 끼 식사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좀 더 의욕이 생기긴 하는데
막상 부엌에 들어서면 혼란스러워지는 게 엄마의 마음이다.

오늘은 또 무얼 만들어 먹나..
우리집만의 <윤식당>주인은
오늘도 어김없이 맨날 똑같은 고민중
뭐 또 어떻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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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현재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어린이식당 운동’활동가로 일하며, 계간 <창비어린이>에 일본통신원으로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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