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집안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커튼이 없는 안방 창으론 벌써 햇볕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봄이다. 안방 바닥에 내려 앉은 볕의 길이만큼 봄은 가까이 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전 8시가 다 되도록 어둑했건만, 요즈음은 일찍부터 집안이 밝았다.
봄볕도 좋지만 난 창의 너그러움이 좋다. 밤엔 어둠을, 겨울엔 찬 바람을, 창은 온 몸으로 맞이한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묵묵히, 지켜 봐주고, 들어준다. 출근길에 바쁜 직장인들, 허겁지겁 등교에 서두르는 아이들까지 투명한 창은 지나가는 사람이든 다가오는 햇살이든 수줍은 소녀처럼 조용히 바라보고 들어주었다.

 

눈을 뜬 뒤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등이 보였다. 등을 돌린 아이의 얼굴은 이제 곧 내 얼굴 크기를 따라잡을 만큼 자랐다. 참 많이도 컸다. 뿌듯하다가도 언제 이렇게 컸다 싶어 놀랐다. 어느새, 라는 생각은 그렇게 갑자기 찾아와 놀라게 한다. 가슴이 아파 몸부림을 치든, 기쁨으로 온몸을 떨든, 시계는 한 번에 한 걸음씩만 움직였지만, 어느새 아이와 단 둘이 보낸 다섯 번째 봄이었고 아이는 그 사이 나란히 서면 내 어깨 가까이까지 다다랐다.


잠들기 전, 아이는 종아리부터 허벅다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아프다며 투덜댔다. 아이는 물었다. 이게 성장통이냐고. 감기가 걸린 것도 아니고 넘어진 것도 아닌데 그저 키가 크는 이유 때문에 아파야 하는 게 억울한 모양이었다. 아이는 자신의 아픔을 알아봐주라는 듯 다리 한 쪽을 손으로 붙잡은 채 깡총거리며 마루를 뛰어다녔다. 아파하는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그 모습이 우습기도, 귀엽기도 했다. 농담과 진담을 섞어 말했다.
“아빠는 네가 부러운데?”
“아픈 게 뭐가 부러워.”
“아빠도 너처럼 좀 아프더라도 더 키가 크고 싶거든.”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더 많이 자고 더 많이 우유를 마시리라.
“아빠는 더 클 수가 없어, 어른이니까. 하지만 난 아빠보다 더 클 거다.”
마지막 말을 웃어 넘겼지만, 선뜻 무럭무럭 크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이가 더 클 거라는 상상을 하면 마음 한 구석이 헛헛했다. 이제 아이가 내 곁을 떠날 거라는 생각. 이제 아이가 저녁 식사자리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도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날 거라는 예상. 내 바람과 상관없이 시간은 똑같이 한 걸음씩 같은 속도로 걸어나갈 테지만.


자신이 학교에서 러브레티를-아이는 편지의 ‘letter’의 단어를 몰라 ‘레티’라고 발음했다-받았다고 자랑하던 이야기, 반장 선거에 나가 쉬는 시간에 보드게임을 하도록 집에 있는 보드게임을 가져오겠다고 선심공약을 했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단 둘이서 저녁을 먹으며 들을 수 있었다. 아이의 학교 이야기를 들을 때면, 듣는 나까지 맑고 투명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아이가 점점 아빠 대신 친구들을 찾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휴대폰을 사 준 날, 아이는 나와 대화하는 걸 멈추고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 받았다. 오후 내내, 그리고 늦은 저녁 시간까지. 개교기념일을 맞이해 아이와 함께 놀이공원에 간 날, 아이는 우연히 학교 친구들을 만난 뒤 내 곁에서 멀어져 갔다. 나중에 전화를 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훌쩍 친구들에게 가버렸다. 아이는 친구들을 보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달려나갔다. 달려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이는 빠른 속도로 내 곁에서 멀어져 갔고 그 만큼 친구들에게 빨리 다가갔다. 친구들과 간식을 먹기 위해 잠시 의자에 앉은 순간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기로 담았다. 아이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아빠와 사진을 같이 찍을 때엔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싫은 표현을 하더니만.

떠날 준비를 하는 구나. 그 생각을 하면 슬프다. 아내의 빈 자리를 대신 지켜주었던 아이였다. 그 아이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였고 고된 삶을 견디게 한 힘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 얼굴을 바라봐주고 내게 말을 걸어주고 시간을 같이 보낸 사람이었다. 그런 아이가 이제 부모보다 친구가 좋다고 하는 모습을 보면 섭섭함보다는 서글픔이 몰려들었다. 그럼, 난 누구와 말을 하고 누구의 얼굴을 바라봐야 하나 라는 생각은 서글픔을 불러왔다.


그러다가 아픈 이별에게서 따뜻함을 느꼈던 기억이 떠올랐다. 헤어진다고 했을 때 기쁘다면 그 관계는 미리 정리를 하는 편이 낫다. 이별이 아련하게 슬퍼진다면 그만큼 만났던 시간이 좋았기 때문일 테다. 가끔은 아이를 돌보며 내 시간이 없다며 팔자 타령도 했지만, 지나고 보면 40년의 시간 중에서 가장 많이 웃으며 행복을 만끽했던 시간이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해야 할 일 때문에 고민을 하지 않으며, 그저 먹고 이야기하고 함께 산책을 했던 시간. 아이가 친구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달려가던 모습을 떠올리면 아이와 함께 했던 시간이 뒤따라 왔다.

 

심리학은 위기의 순간 지식이라기보다는 지혜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내가 아이를 한 인격체로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내 삶과 아이의 삶이 다르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 가치관과 아이의 가치관은 다를 수밖에 없으며, 내 윤리관과 아이의 윤리관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순간, 아이는 나와 전쟁을 벌인다고 했다.
독립을 위한 전쟁. 그 독립 전쟁에서 결국 승리를 하는 건 아이이며 아이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더 정확히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부모를 향한 복수의 칼을 때로는 조용히 행동으로, 때로는 큰 소리로 부모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독립한다는 한 교수님의 말을 되새겼다. 독립전쟁을 치르지 않기 위해선 아이의 독립을 준비해야만 했다. 떠나가는 아이. 커가는 아이를 떠나 보내지 않은 채로 내 마음대로, 내 의지대로, 내 삶의 방식으로, 아이의 삶을 조정하려 할 때, 그러면서 자신의 뜻으로 아이를 조정하려는 마음을 너를 위한 거야 라는 명분으로 부모의 이기심을 숨길 때, 그 비극은 나와 아이 모두에게 짙게 드리운다, 고 했다.

 

그러고보면 아이가 성장통을 겪을 때 부모는 마음으로 성장통을 겪는다. 내 곁을 떠나 친구나 또래에게 가려는 아이를 붙잡지 않은 채 지켜봐야 하는 아픔 말이다.


최근 좋아하게 된 시인 엘렌 바스의 시가 떠올랐다

.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한다.
올챙이는 개구리가,
애벌레는 나비가,
상처받은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한다.

There is a part of every living thing
That wants to become itself
the Tadpole into the frog,
the chrysalis Into the butterfly,
a damaged human being into a whole one.
-Ellen Bass

 아빠와 아들.jpg

(출처: http://www.lifeofpix.com/wp-content/uploads/2015/04/Life-of-Pix-free-stock-photos-kid-boy-bubbles-back-leeroy-copie.jpg)

 

지나고 보면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건 아이를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일이었다. 그리움은 사람들을 밀쳐내고 침묵한 채로 마음 속에 혼자 넓은 공간을 차지한 채로 그렇게 자리잡았다. 그 빈 공간에 아이가 들어와 나를 달랬던 시간이 지난 5년의 시간이었다. 아이가 떠난다는 건 혼자서 그리움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게 싫어서일 수도 있을 것도 같다.

아이가 점점 떠나가는 그 빈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미리 걱정을 앞당겨 하기보다는 아이가 독립을 하기 전까지 아이의 눈을 더 자주 보고 이름을 더 자주 부르며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다. 내년 봄은 또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겠지만.

 

만남보다 이별이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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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갑작스럽게 아내와 사별하고 OBS 방송국 뉴스앵커와 기자생활을 그만둔 뒤, 거들떠보지 않던 가정으로 되돌아갔다. 아이의 자존감을 키우고 사랑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상담심리학과에 진학했다. 삶과 죽음, 그리고 가족의 의미를 담은 <지금 꼭 안아줄 것>이란 책을 출간한 뒤 또 다음 책을 준비중이다.
이메일 : areopag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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