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와 전쟁하고 둘째와 씨름하며 
푹 자고 차분히 먹을 기본권마저 잃어

148768595567_20170222.JPG » 블록으로 무언가를 만든 뒤 블록 통 안에 들어간 큰아이. 아이의 모든 ‘놀이’에 엄마는 자신의 감정과 일거리와 무관하게 열심히 손뼉 치고 응답해야 평화가 유지된다. 박수진 기자
육아휴직 중인 나는 종종 “잘 쉬고 있냐”는 인사를 듣는다. 기분이 좋을 땐(둘째아이가 규칙적으로 먹고 자서 운신의 폭이 넓을 때) “네, 잘 쉬고 있죠”라고 답한다. 하루가 왕창 꼬인 날(큰아이가 어린이집 갈 때부터 ‘밥 싫다’ ‘세수 싫다’ ‘이 옷 싫다’ 등 각종 ‘싫다’를 선보이고 둘째까지 계속 칭얼댈 때)에는 순간 발끈해서 “쉬는 거 아니거든요”라고 답한다.

나도 쉬고 싶다. 둘째가 잠든 때 미처 개지 못 한 빨래더미를 밀어두고 스마트폰 좁은 화면으로 영화 보는 것 말고, ‘첫째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기 전에 청소하고 설거지도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쌓아둔 채 쪽잠 드는 것 말고, 진짜 쉬는 것.

괜히 싱글일 때 기억을 기웃댄다. 종일 뒹굴다 배고플 때쯤 피자 한 판 주문하고, 맥주나 와인도 한 병 열어서 홀짝대다 만화책이나 소설책 보고, 이불 속에 들어가 아무 프로그램이나 돌려가면서 TV 보다 깜빡 잠들던 어느 토요일. 모자 푹 눌러쓰고 집 앞을 걷다가 근처 영화관에서 영화 보고 밤이슬 맞으며 천천히 걸어서 집에 돌아오던 또 다른 토요일. 페이스북에 지인이 올린 한라산 설경을 보며 ‘등산이 뭐더라’ 혼잣말을 주억거리며 나를 동정한다.

지금 나는 시간을 죽일 권리가 없다. 오후 4시까지의 노동을 촘촘히 짜지 않으면 이후는 엉망이 된다.

첫째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바로 그 시간부터 나는 아이의 ‘놀이친구’가 돼야 한다. 큰아이가 온 집 안의 베개를 모아 ‘이건 까마귀 둥지다’ ‘이건 동생 집이다’ ‘이건 펭귄 집이다’라며 만들어내는 창작물에 내가 쌀 씻고 양파 껍질 까느라 제대로 응대해주지 않으면 아이는 “엄마 이것 좀 봐”에서 시작해 “엄마, 나는 이거 엄마가 봐주면 좋겠는데”를 거쳐 “엄마, 미워” 하며 징징댄다. 이어 놀 상대를 찾아 동생에게 간다. 잘 자고 있는 동생 옆에서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결국 둘째를 깨워 울린다. ‘빌려준 것’이라 주장하며 동생 베개를 빼 간다. 둘째가 바운서에 앉아 있을 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재미있어 하며 손에 쥐고 노는 나비를 가져가 울리기도 한다.

그럼 나는 ‘그래, 너 오기 전에 노닥거린 내 탓이다’라고 자책하며 다음 날 스스로 꽉 짠 낮 시간을 보내는 가사노동 인간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오후 4시 이후에도 집안일들이 남아 있는 날엔 첫째와 전쟁하고 둘째와 씨름하며 게으른 나를 자책하고, 왜 이러고 사나 자조하다 피폐해진다.

글 쓰는 사람 은유는 책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에서 “엄마로 사는 건 인격이 물오르는 경험이 아니었다. 외려 내 안의 야만과 마주하는 기회였다. 생명체가 제 앞가림할 때까지 나는 혼자 있을 권리, 차분히 먹을 권리, 푹 잘 권리, 느리게 걸을 권리 같은 기본권을 몽땅 빼앗겼다. 그런 전면적이고 장기적인 실존의 침해를 감내하다 보면 피폐해진다. 성격 삐뚤어지고 교양 허물어진다”고 했다. 애 둘 있는 엄마인 필자가 이 대목을 포함해 한 줄 한 줄 밑줄 긋게 만드는 책을 써냈으니 그 ‘야만의 시간’도 언젠가 끝나겠지.

아무튼 육아휴직 중인 사람들을 만나면 “잘 쉬고 있냐” 대신 “잘 지내고 있냐”고 물어봐주면 좋겠다. 각종 기본권을 상실하고 바깥은 물론 자신과도 단절되는 것 같은 ‘존재 불안’으로 교양이 허물어진 터라 어떻게 대꾸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이 글은 한겨레21 제1150호(2017.2.27)에 실린 글입니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첨부
박수진
서른여덟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뒤 육아휴직 중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결정적 순간에 감정적으로 휙 저지르고 보는 스타일. 일도, 육아도 그렇게 해서 온 식구가 고생하는 건 아닌지 또 고민하는 ‘갈짓자 인생’. 두 아이의 엄마로서, 좋은 기자로서 나를 잃지 않고 행복하고 조화롭게 사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뭘까, 그 길을 찾는 것이 지금의 숙제다.
이메일 : jin21@hani.co.kr      

최신글

엮인글 :
http://babytree.hani.co.kr/31713959/d51/trackback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
1825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육아카툰66편] 아... 이 놈의 봄봄봄!!! imagefile [2] 지호엄마 2017-04-04 9322
1824 [정은주의 가슴으로 키우는 아이] 입양은 눈물의 씨앗인가 imagefile [6] 정은주 2017-04-03 10821
1823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아이들 세상으로 가는 첫 차를 타다 imagefile [3] 홍창욱 2017-04-01 9997
1822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아들과 스마트폰, 그리고 나의 투쟁 imagefile [5] 신순화 2017-03-29 12093
1821 [최형주의 빛나는 지금] 해피 버스 데이 투 미 imagefile [4] 최형주 2017-03-29 9578
1820 [강남구의 아이 마음속으로] 성장통과 독립전쟁 imagefile [6] 강남구 2017-03-27 11137
1819 [정은주의 가슴으로 키우는 아이] 세월호와 함께 올라온 기억 imagefile [2] 정은주 2017-03-27 9729
1818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아빠 정수리에 머리도 별로 없는데 imagefile 홍창욱 2017-03-26 12137
1817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욱하지 말자, 그냥 화를 내자 imagefile [3] 케이티 2017-03-26 8961
» [박수진 기자의 둘째엄마의 대차대조표] 엄마도 쉬고 싶다 imagefile [2] 박수진 2017-03-24 9616
1815 [박진현의 평등 육아 일기] 두 번의 출산 - 차가움과 편안함의 차이 imagefile [2] hyunbaro 2017-03-22 8836
1814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imagefile [14] 신순화 2017-03-22 13390
1813 [아이가 자란다, 어른도 자란다] 결국, 사람이더라 사랑이더라 imagefile [2] 안정숙 2017-03-22 37625
1812 [정은주의 가슴으로 키우는 아이] 입양 편견 없애는 ‘물타기 연구소’를 설립하다 imagefile [8] 정은주 2017-03-20 12859
1811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육아카툰65편] 술맛이 좋아, 해물파전이 좋아 imagefile [2] 지호엄마 2017-03-20 27591
1810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육아도 연애와 매 한가지. 울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imagefile [2] 홍창욱 2017-03-19 10129
1809 [강남구의 아이 마음속으로] 그게 너거든. 그런데 그게 어때서. imagefile [4] 강남구 2017-03-17 11396
1808 [박진현의 평등 육아 일기] 아내가 하향선택결혼을 했다. [6] hyunbaro 2017-03-15 8272
1807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나도 가끔은 아내의 곁이 그립다 imagefile [2] 홍창욱 2017-03-14 11750
1806 [최형주의 빛나는 지금] 큰 힘에 몸을 싣고 흐르면서 살아라 imagefile [2] 최형주 2017-03-14 10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