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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5일은 둘째딸 윤정이의 생일이다.

그러나 딸 생일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3월 1일에 아버님이 다시 중환자실로 들어가게 되셔서 가족 모두 비상이었던 탓이다.

지방에 사는 자손들이 모여들고 손주들도 다들 올라오게 되니 생일 전날엔 모두

우리집에서 자게 되어 갑작스레 큰 손님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딸 아이의 생일이 코 앞이었다.

안그래도 며칠전에 생일에 대해서 물어봤을때 윤정이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냥, 소고기 미역국만 끓여주세요. 할아버지 아프셔서 엄마도 바쁘시잖아요"

윤정이는 이런식이다.

제 마음은 숨기고 엄마 아빠, 다른 식구들 사정부터 살핀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기특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짠하다. 다른 이의 사정을 먼저 살피기에는 이제 막 열한살이 된

딸 역시 어린 아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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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식구들의 저녁을 차려낸 후 사촌 언니들과 윤정이 생일 축하를 하기 위해 제과점엘

들렀더니 작은 동네 에 달랑 둘 뿐인 제과점 모두 케익이 다 팔렸다.

할수없이 빵 두덩이를 사 와서 가장자리를 딸기로 두르고 그 위에 촛불 열한개를 꽂았다.

윤정이는 그래도 환하게 웃었다.

 

생일날 아침에도 대식구 아침상을 차리고 서둘러 병원가는 길을 살피느라 정신없이 지나간후

아이들만 남았을때 소고기 미역국에 불고기로 조촐한 생일상을 차려 주었다.

윤정이는 미역국이 맛있다며 한 그릇 가득 맛있게 먹었다.

그날 저녁 면회는 아이들은 집에 있게 하고 남편과 둘이 다녀왔다.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은 윤정이에게 생일선물로 '트와이스 ' CD를 사주고 싶다고 했다.

'트와이스'는 윤정이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다.

어디서 배웠는지 히트곡 가사를 줄줄 외어 부른다. 덕분에 막내 이룸이는 입학하기도 전에

트와이스 노래를 다 익혀 버렸다.

 

나는 펄쩍 뛰었다.

"아직 어린애 한테 무슨 아이돌 CD야. 집에만 오면 그거 틀어놓고 듣기만 하면 어쩌려고.."

대중문화에 대해 삐딱한 나는 반대를 했다. 안그래도 2학년때까지 '굴렁쇠'가 부르는 이쁜

노래들을 즐겨 부르던 딸이 3학년이 되어 방과후 프로그램으로 '방송댄스'를 배우게 되면서

아이들 노래를 즐겨듣고 툭하면 몸을 흔들어 대는 것이 마냥 이쁘게만 보이진 않던 참 이었다.

"윤정이가 좋아하잖아. 필규가 좋아하는 마블책 사주는거나 윤정이 좋아하는 트와이스

사주는거나 뭐다 달라. 아들이 좋아하는건 자주 사주면서 윤정이는 언제 한번 진짜

좋아하는거 제대로 사주기나 했냐?"

 

듣고보니 그런 그랬다.

물건욕심이 많고 가지고 싶은 것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필규는 어려서부터 레고며, 마블이며

크면서 관심이 생긴 유희왕 카드같은 것들을 잔뜩 선물 받았다. 용돈을 받으면서는

보란듯이 제 돈을 모아 그런것들을 사곤 했다.

그럴때마다 고집부리는 아들을 설득하고, 설명하고, 바라는 것들을 유예시키느라

애 쓰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윤정이는 제가 원하는 것은 미리 단념하거나

일부러 작은 것으로 바꿔 말하거나, 안 가져도 된다고 포기하곤 했다.

오빠 때문에 힘들어 하는 엄마 아빠 입장을 먼저 헤아리는 것이다. 처음엔 그게 참 대견하고

의젓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답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늘 윤정이한테는 의견을 물어볼때 정말 네 마음이 원하는 건지 아닌지, 다른 사람

마음 말고 네 마음 먼저 들여다보라고 권하곤 했다. 윤정이는 그런 딸 이었다.

윤정이를 잘  아는 남편은 그래서 더욱 열한살 생일엔 윤정이가 깜짝 놀라고 기뻐할

선물을 주고 싶은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한살은 아주 어린 나이가 아니다. 아이와 소녀의 중간쯤이라고나 할까.

동요도 좋고, 굴렁쇠도 좋지만 트와이스나 방탄소년단의 노래가 좋아지고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들의 신상에 대해서 궁금해지고 학교가기 전에 얼굴에 로션은 꼭

챙겨 바르는 나이다.

엄마인 내가 대중문화에대해서 삐딱하든, 아이돌 가수의 노래 보다 동요를 더 즐겨부르기를

바라든간에 그건 어른의 생각일 뿐 윤정이는 굴렁쇠도 트와이스도 모두 사랑하는 아이일 뿐이다.

그 노래들이 좋고, 그 노래에 맞춰 춤을 출 때 행복한 지극히 평범한 아이인 것이다.

 

생일이 하루 지난 월요일, 퇴근한 남편은 윤정이를 불러 뭔가를 내밀었다.

두장 가득 펜으로 적은 편지와, 작은 선물이었다.

선물을 뜯어보니 '트와이스' CD가 들어 있었다. 멤버들의 사진과 이야기들이 듬뿍

실려있는 두툼한 책도 함께 있었다. 윤정이는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흥분하고 좋아하는지 그 표정을 본 순간 내가 잠시 품었던 염려와 삐딱한 생각조차

미안할 지경이었다.

 

흰 종이 두장 가득 써 내려간 큰 딸을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는 아빠의 편지를 읽으며

윤정이는 끝내 눈물을 훔쳤다. 제 마음을 다 알아주고, 위로해주고, 인정해주는 아빠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 것이다. 윤정이는 아빠를 꼭 안았다. 남편도 큰 딸을

오래 오래 안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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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윤정이는 제 방에 있는 포터블 플레이어에 선물받은 트와이스 CD를 걸어 놓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일기를 썼다.  일기장엔 이 날의 기쁨과 행복이 생생하게

기록되고 있었다.

좀처럼 색이 바래지 않는 생생한 기쁨과 행복이 뒷모습에서도 뚝뚝 흘러내렸다.

윤정이는 정말 정말 너무나 좋았던 것이다.

 

스마트 폰도 없고 케이블 방송도 나오지 않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사는 윤정이는

도회지 아이들에 비해 아이다운 순수함이 여전히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그런 딸 아이가 처음 마음을 주고 열광하게 된 '트와이스'를 나도 사랑해주기로 했다.

그 얼굴이 그 얼굴 같고, 너무나 많아서 누가 어떤 그룹 맴버인지 당췌 구분도 안 되지만

친절하고 영리한 이룸이의 설명을 들어가며 트와이스 멤버들을 한명 한명 익혀가고 있다.

떄로 어른은 아이에 대해 너무 앞서 염려하고, 너무 미리 의심한다.

아이는 아이답게 그 시대의 문화와 공기속에서 자라는 존재일 뿐이다.

그 시대가 열광하는 음악과 가수들에 마음을 주고, 그런 문화들을 누리면서 자라난다.

아이가 접하는 세상이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면 문제가 될수도 있지만 자연속에 살며

시골길을 걸어 작은 학교에 다니고, 영상보다 책을 더 많이 보며 자라는 착한 딸 마음에

내가 너무 무심했다.

 

내 염려가 쓸데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윤정이는 학교 다녀 온 후 잠깐 잠깐

트와이스 노래를 틀어 놓고 음악을 듣곤 한다. 다른 식구들한테 방해가 되지 않을만큼

적당한 볼륨은 집안의 생기를 더해준다.

자주 들으니 제법 리듬감이 좋다. 멤버들도 우리집 딸들만큼 이쁘장하다.

'소녀시대'와 '샤이니' 이후의 아이돌들은 다 그집이 그집인것으로 여기고 살았는데

이젠 트와이스며 걸스데이며 구구단 같은 아이들 한테도 마음을 주어볼까.. 싶다.

 

그나저나 딸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알고, 더 관대한 남편..

은근 고맙다. 다행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적은 아빠인데도 늘 아이들 마음을 헤아리고 있고

응원해주는 사람이라는 것이 참 고맙다.

 

그나저나 남편..

내 생일에도 축하 편지 써 줘.

그것도 두 장 꽉 채워서..

딸에게 준 편지 슬쩍 읽어보니 글도 아주 잘 쓰더만..

마누라한테도 재능을 발휘할꺼지?

두 둔 뜨고 기다릴꼬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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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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