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도 욕조는 대개 비어있는 날이 많았다. 체감 기온이 영하 10도를 넘어서면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몸을 녹여도 좋으련만 그러기에는 ‘굳이’ 라는 생각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온수값도 걱정이었다. 몸에 열이 많아 온천이나 찜질방을 선호하지는 않는 편이라 ‘굳이’ 집에서까지 욕조 안에 물을 받아 놓고 목욕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가도 밖에 나갔다가 날이 많이 추운 날에는 몸을 녹이고 싶은 생각에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아볼까나 란 생각도 잠시, 그럴 때면 어머님의 옛날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 아껴써라. 하긴 어머님이 물만 아낀 건 아니었다. 어린시절 집에서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목욕을 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경험과 경험이 만들어낸 생각 때문에 새 집으로 이사를 온 뒤 욕조가 딸린 화장실이 생겼지만, 욕조는 텅 비어 있었다.

 

 아이가 욕조가 있는 화장실로 들어간 날이었다. 동네에서 눈썰매를 마친 뒤였다. 방수가 되는 옷을 입고 가라고 잔소리를 해댔지만 아빠의 고집과 姜 씨 성을 단 아이는 자신의 뜻대로 평소에 입는 옷을 입고 눈썰매를 타러 갔다.
“내가 빨면 되잖아.”
당당한 목소리. 오냐. 그래라, 했다. 1시간이 좀 지나 아이를 찾으로 갔다. 아이 바지는 하얀 솜사탕처럼 바뀌었다. 욕조의 수난.JPG

“민호야, 거봐. 눈이 옷에 달라붙었잖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살짝 춥다는 아이의 말에 안타까움에 얄미움을 섞어 그렇게 쏘아 붙였다.
“내가 빨게.”
 다시 자기가 빤단다. 조금은 미안했나 보다. 목소리에 미안함이 스며들어있었다. 화가 나려다 그 한마디에 녹았다. 자기가 빨겠다는 그 말 한 마디에. 그러다 문득, 또 아이에게 속았나? 아이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해야 위기에서 빠져나올지 귀신처럼 아는 듯 했다. 내가 빨게 란 그 한 마디에 애들은 그러면서 논다는 생각으로 아이를 끌고 왔다. 질.질.질.

 

 욕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이 잠겼다. 조용했다. 이제 문도 잠그고 샤워를 하는 나이가 됐나 란 생각을 하며 옷방으로 이동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왔지만 욕실은 조용했다. 용변을 보나? 저녁을 차릴 준비를 하려는데 화장실 안에서 물줄기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콸콸콸.
 “화장실 안에서 뭐해?”
 “빨래 하려고.”
 뭐 빨래한다고? 문을 열었다. 아이는 옷을 모두 벗고 있었다. 아이 머리카락엔 물 한 방울도 달려있지 않았다. 아이 뒤에 있는 욕조에서 큰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아빠, 빨래 내가 대신 빨아줄게.”
 욕조를 들여다 봤다. 평소에 물 한 방울 잘 받아 놓지 않았던 욕조에 아이 옷이 쌓였다.
 “아빠 신발도 더러워서 같이 넣었다.”
 욕조2.JPG
아빠가 힘들까봐 흙에 눈이 범벅이 된 운동화까지 욕조에 담갔단다. 아빠를 이렇게 생각해준다니 기특하구나, 라고 말하는 걸 듣고 싶었는지 아이는 눈을 반짝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빨랫감을 물에 받아 불릴 계획을 스스로 짠 게다. 운동화까지. 아놔. 미안하게도 민호에게 고맙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나도 민호처럼 민호의 눈을 쳐다봤다.

 

 욕조 팔자도 참 사납다. 정작 집주인과 아이는 가만히 있는데 운동화가 욕조를 찾았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던데 눈오는 저녁 욕조에 운동화다. 욕조야, 너도 참 고생이야. 아이덕분에 평소에 구경하지도 못한 옷들이며 운동화가 한아름 쌓였다. 웃옷, 웃옷 안의 겉옷, 겉옷 아래 바지, 그 안에 내복 그리고 속옷까지.
 “아빠 추워.”
 춥지. 샤워할 공간을 옷가지와 운동화에 양보를 했으니. 그래도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아빠를 위해 빨래를 해 줄 생각이었으니까. 이런 게 부담이라고 하는 건지. 가끔 아이는 아빠를 위해 하는 일들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하긴 어머니도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음식 재료에 손이 가 부엌에 가 이것저것 꺼내놓으면 들리는 어머니의 한 마디. 남자는 부엌에서 그러는 거 아니다. 사실 어머님을 도와준다는 건 명분이었고 머릿속으로 상상한 음식을 실제로 만들고 싶었다. 나에게는 엄격하게 남자이기 때문에 부엌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하시던 어머니는 아버지는 끌고 들어오셨다. 아버지도 남잔데. 어린 아이에겐 남자는 부엌 일을 하는 게 아니라면서 부엌 출입 금지를 시키셨지만,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부엌 한 구석에서 열심히 마늘을 까시고 빻으셨다.

 

 “아빠, 깔때기”
아이가 부엌에서 깔때기를 찾았다. 민호에겐 넌 남자이니까 부엌에 들어오지 마, 라고 할 수가 없다. 우리집 주방일은 전부 아빠가 하니까. 아빠를 위해 빨래를 욕조에 넣은 아이는 건강에 좋은 과일 주스를 만들어 먹자고 했다.
집에서 과일 주스를 만들기 위해선 몇가지 도구가 필요했다. 그 가운데에 하나가 바로 깔때기였다. 부엌을 뒤지며 집에 있는 패트병을 찾아냈다. 마지막으로 국자를 찾아냈다. 집에서 천연 과일주스를 만들어 먹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먼저 귤을 깔때기 위에 올려 놓는다. 깔때기 아래는 패트병과 연결한다. 국자로 깔때기 위에 올린 귤을 꾸욱 꾸욱 누른다.
집에서 오렌지 주스를 만들 때엔 몇 가지 부작용도 따랐다. 오렌지주스를 만드는 사람이 어린 아이라면 국자를 누르는 아이의 손이 가끔 부르르 떨린다. 패트병을 잡은 손은 가끔씩 휘청거렸다. 그 장면을 만약 본다면, 혹시나 국자나 깔때기가 부엌 사방으로 튀지는 않을까 불안하다는 부작용도 생긴다. 마지막으로 아이 손으로 눌려진 귤은 너덜너덜해지고, 귤즙은 두 세 스푼 정도밖에 나오지 않아 허무하다. 아이는, 생각보다 얼마 안 나오네, 하면 그만이지만.

_MG_1982.JPG

 그리고 아이는 장염이 걸렸다. 배는 아프고 제대로 먹지는 못하고. 그런 아이에게 빨래 언제 해 줄 거냐는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다. 욕조에 담긴 빨래가 엄두가 안 나 그대로 두었다. 빨래 대신 흰죽을 끓였다. 마루에서 아빠를 찾는 소리.
“아빠~”
아픈 아이가 큰 소리라니. 아이에게 달려가니 아이는 엉거주춤하게 서서 나를 쳐다봤다. 표정을 보니 무슨 일이 생기긴 생겼다.
 “아빠 방구를 끼려고 했는데 그만…”
 그래서 다리를 살짝 벌리고 있었구나.
 “벗어서 옷 갈아입으면 되지.”
 아이에겐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오히려 걱정은 내가 됐다. 요즈음 장염이 유행이라는 걸 보니 전염력도 꽤 있을 텐데 란 걱정. 아이 속옷과 내복을 고스란히 벗겨서 마루에 놓은 채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 변기로 옮겼다. 한참을 지나 아이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괜찮아?”
 “응.”
 아빠도 옛날에 그런 적이 있었다고 했다. 혹여나 아이가 부끄러워할까봐. 몸이 아파 실수를 한 건 잘못이 아니니까 말이다. 수치스럽지 않은 일로 수치스러워하면 안 되니까, 그건 실수도 아니고 아팠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아이 옷을 갈아입히고 거실로 나왔다.

 

 그런데 마루에 벗어둔 아이 옷이 보이지 않았다.
 “민호야, 너가 아까 벗어둔 어디에 두었니?”
 민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아빠 힘들까봐 그 옷들도 욕조에 넣는데.”
 .
 .
 .
 팔자 사나운 욕조는 눈 묻은 옷들에 운동화에다 이번엔 찔끔한 양이지만 용변이 묻은 속옷까지 끌어 안고 있었다. 게다가 장염에 걸린 아이의 속옷이라니. 미안하다, 욕조야.
미룬 빨래를 했다. 아니 미룬 빨래를 해야만 했다. 혹여나 장염균이 온 옷에 묻을 수 있으니까. 욕조도 깨끗하게 씻어야만 했다. 민호야 고맙다, 아빠 생각해줘서. 겨울 옷을 드라이를 맡기면 세탁비가 많이 나와 울샴푸로 손빨래를 했는데, 민호는 그런 아빠를 지켜만 봤다. 왜냐하면 민호는 장염에 걸렸으니까.

방학을 하고 나서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우리 두 사람은 잠이 들기 전 달콤한 이야기를 나누다 잠에 들었다. 불을 껐는데 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아프니까 좋은 게 하나 있더라.”
“뭔데?”
“아프니까 빨래를 안 해도 되었잖아.”
어이없는 한숨은 이럴 때 나오는 구나.
민호야, 굿나잇.
피곤한 나에게도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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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갑작스럽게 아내와 사별하고 OBS 방송국 뉴스앵커와 기자생활을 그만둔 뒤, 거들떠보지 않던 가정으로 되돌아갔다. 아이의 자존감을 키우고 사랑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상담심리학과에 진학했다. 삶과 죽음, 그리고 가족의 의미를 담은 <지금 꼭 안아줄 것>이란 책을 출간한 뒤 또 다음 책을 준비중이다.
이메일 : areopag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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