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1).jpg » 서울 금천구에 있는 한 초등학교 학부모회에서 학부모들이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할지 구상하는 토론을 하고 있다. 박재원 아름다운배움 행복한공부연구소 소장은 학부모들이 주체가 되어 건강한 학부모 문화가 형성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박재원 소장 제공.

“예체능은 3학년까지 끝내고 4학년부터는 수학에 올인해야 한다.”
“입시 성공의 조건은 할아버지의 경제력, 엄마의 정보력, 그리고 아빠의 무관심이다.”

부모들 사이에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다. 언젠가부터 돈과 정보력이 없으면 부모로서 제구실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부모가 주도하는 사교육은 중·고등학생에서 초등학생으로, 이제 영유아로까지 점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지난 9일 육아정책연구소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만 5살 아동 10명 중 8명, 만 2살 아동 10명 중 3명 이상이 사교육을 받고 있을 정도로 사교육 시작 연령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사교육 지향 문화 속에서 부모 주도의 사교육이 미치는 폐해를 알리고, 건강한 학부모 문화 회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전문가가 있다. 시민단체 아름다운배움(이하 아움) 산하의 행복한공부연구소 박재원(53) 소장이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사교육 1번지인 대치동에서 인기있는 학습법 상담가였던 그는 대치동에서 부모와 아이의 관계가 어느 정도까지 파탄날 수 있는지 직접 목격했다. 

대치동에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 주도로 공부를 강요당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한 아이들이 많았다. 또 부모가 만든 ‘감정 지옥’ 상태에서 탈출하려고 부모와 대화를 끊거나, 틱이나 게임 중독,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ADHD)와 같은 이상 증세를 보이는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이런 부모 주도의 사교육으로 인한 부작용은 부모들의 침묵 속에 알려지지 않고 소수 성공 사례만 입소문으로 퍼졌다. 

 

부모들 침묵 속에 소수 성공 사례만


박재원.jpg » 부모교육 전문가 박재원 아름다운배움 행복한공부연구소 소장. 양선아 기자

학습·진로 상담을 하던 그는 부모 교육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후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상담소장을 맡다가 현재는 폐교 위기에 몰린 농어촌 학교의 환경 개선 작업을 벌이는 시민단체 ‘아움’에서 농어촌 지역의 부모들을 만나고 있다. 그는 사교육에 포위당한 대한민국 엄마들을 어떻게든 구출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최근 <대한민국 엄마 구하기>라는 책도 펴냈다. 지난 7일 서울 명동의 한 카페에서 박 소장을 만나 그의 현실 진단과 이에 대한 해법을 들어봤다. 


“엄마들끼리 카페에서 앉아 주고받는 이야기들의 최초 발신자가 누구인지 아세요? 바로 사교육 업체입니다.”


사교육 시장은 이미 공급 과잉 상태다. 저출산으로 아이들이 줄고, 경기 침체로 부모들의 구매력이 줄어들었다. 사교육 업체는 생존을 위해 갈수록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펼칠 수밖에 없는데, 초보 부모들이 처한 양육 환경은 과거보다 더 취약해졌다. 과거처럼 아이를 함께 보살펴주는 공동체 없이 ‘독박 육아’를 한다. 초보 엄마 아빠가 실수를 해도 이웃과 어른들 도움으로 회복할 수 있는 ‘눈에 안 보이는 공동의 양육 시스템’은 없다. 특목고·자사고 등장은 사교육 의존성을 더 강화시켰다. 박 소장은 이런 상황을 ‘표준 규범이 사라진 시대’라고 진단한다. 양육의 표준 규범이 사라진 빈자리를 ‘옆집 엄마’가 채웠다. 그런데 그 옆집 엄마가 말하는 정보는 대부분 사교육 업체에서 흘린 정보다. 

  

죄책감을 느끼거나 교육 아예 포기


2000년대부터 본격화된 사교육 지향 문화는 20여년 동안 이어오면서 기존의 건강한 학부모 문화를 파괴했다. 박 소장은 “부모들의 심리까지 심각하게 변형된 상태”라며 “강북 지역의 부모들이나 지방의 부모들을 만나보면 사교육을 충분히 못 시킨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거나 아예 아이 교육을 포기해버리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걱정했다.


현재 학부모 문화에서는 아이를 신뢰하는 부모는 약세이고 아이를 치밀하게 관리하는 엄마가 강세다. 학교에 대한 믿음과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있는 엄마는 약세이고, 사교육을 맹신하고 학교를 우습게 아는 엄마가 강세다. 정상적인 아이의 성장과 발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엄마는 약세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엄마가 강세다. 따뜻한 엄마, 행복한 가정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엄마보다는 아이가 특목고,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엄마들이 강세다. 박 소장은 “잘못된 학부모 문화 속에서 부모는 ‘진짜 부모’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너무 힘들고, 아이들은 학업 스트레스에 짓눌리고 부모의 감정 폭력에 노출된 상태”라고 진단한다.


박 소장은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려면 공교육을 강화하고 사교육을 억제하는 정책 외에도 건강한 학부모 문화 회복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런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그는 ‘콜라보(협력)맘’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사교육을 시키느냐 안 시키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부모와 아이의 협력 관계입니다. 아이가 원하지 않는데 부모가 억지로 강요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어렵다고 도움을 요청할 때 부모가 도와주는 것은 진심인 것이죠. 답은 아이에게 있어요. 엄마의 주도성이 아니라, 엄마가 아이와 ‘콜라보’를 이뤄 한 팀이 되면 엄마도 아이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이 길은 부작용도 적고 효과도 탁월합니다.”  

 

문제아 만들고 부모 불안하게


아이와의 협력 외에도 박 소장은 가정과 학교의 협력도 강조했다. 개별 부모가 아무리 좋은 부모가 되겠다는 의지를 다져도 현재의 잘못된 학부모 문화를 당해내기 힘들다. 따라서 아이를 같은 학교에 보내는 부모들끼리 학교라는 공동체 안에서 건강한 학부모회 활동을 한다면 이룰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중독 문제를 풀기 위해 학부모회가 중심이 돼 스마트폰 사용에 대한 학교·아이·부모 3자 협약을 맺고 캠페인을 펼쳐본다거나, 학부모회가 중심이 돼 학교에 방과후 예습·복습 교실을 열어달라고 학교에 요청해볼 수도 있다.


“대치동 엄마들처럼 사교육 안 시켜도 얼마든지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의 학업 성취도도 높일 수 있고요. 사교육 업체의 공세로 이제는 아예 그런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미 우리 부모들은 훌륭한 부모이고, 우리 아이들은 훌륭합니다. 사교육 업체가 우리 아이를 자꾸 문제아로 만들고, 부모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죠.”


‘대치동은 틀렸고, 우리는 옳다’는 것을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다는 박 소장은 인터뷰가 끝나자 연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날 만날 학부모회 부모들을 도울 실질적인 방법을 찾으려는 것이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