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룸이 리스.jpg

 

12월이 되고서도 성탄절 따윈 관심도 없었다.

매주마다 광장으로 모여드는 촛불들과, 새 아침이면 또 도착해 있는

수많은 박근혜 게이트 관련 뉴스들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학부모회장으로 보낸 1년 사업 마무리 일도 많았다.

 

늘 허위허위 달려 나갔다가 지쳐서 돌아온 집에서 그나마 애들하고

밥 해 먹고 사는 일로도 넘치게 넘치게 고단했었다.

성탄절을 이틀 남긴 오늘까지 집 안에 트리조차 설치되지 않았으니

올해는 정말이지 성탄절은 그냥 주말 정도로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며칠 전에 남편 회사 근처에서 모처럼 저녁을 먹게 되었을때 애들이 좋아하는

지브리 관련 케릭터 용품을 파는 가게에 들러 선물도 하나씩 안겨 주었다.

"이게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미리 주는거야" 하고 다짐도 받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25일엔 그저 맛있는 음식이나 먹으며 집에서 쉬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른들의 순진한 계획은 어른보다 백배는 더 순수한 아이들 앞에서

언제나 무너지기 마련이다.

 

하나씩 멋들어진 지브리 선물을 받고 온 그날 밤,

일곱살 막내가 창 밖을 보며 이렇게 소리질렀다.

"산타 할아버지... 선물 꼭 주세요. 아셨죠?"

"이룸아, 뭐 하는 거야?" 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산타 할아버지한테 크리스마스 선물 달라고 부탁했어요. 잘 들리라고 창 문 앞에서요"

"크리스마스 선물은 이미 받았잖아. 토토로 다이어리로..."

"그건 엄마 아빠가 주신 크리스마스 선물이구요, 산타 할아버지도 주시겠죠"

나는 허걱 하는 마음으로 막내를 다시 보았다.

영악하게 산물 하나를 더 받아내려는 아이의 노련한 눈빛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의 표정은 너무나 맑았다.

아이고...

 

"언니, 산타는 정말 있지?"

막내는 열살 언니에게 물었다. 엄마의 마뜩한 표정이 맘에 걸린 모양이다.

"그럼, 정말 있어. 핀란드에는 산타가 사는 마을도 있는데, 산타 할아버지가 너무 바쁘면

선물을 부모들한테 택배로도 보낸대. 그러면 엄마 아빠가 그걸 머리맡에 두기도 한대"

눈치빠른 둘쨰는 동생 덕에 선물 하나 더 받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으로

이렇게 열심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거 보세요, 엄마.. 산타 할아버지는 오신다구요"

막내는 한껏 들뜬 표정이었다.

아이고...

 

그리고 어제, 유치원에서 막내가 만들었다며 자랑스럽게 내민 크리스마스 리스를 보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 산타 할아버지 뭐든지 주세요, 이룸- 이라고 쓰여 있던 것이었다.

글씨는 또 어찌나 정성스럽게 또박 또박 썼는지, 이걸 보고도 무시할 수 있는 산타는

전 우주에 없을 것 같았다.

산타가 주는 거면 뭐든지  좋다는, 뭐라도 받고 싶다는 이 강렬하고 뜨거운 마음 앞에

어느 부모가 지갑을 안 열 수 있겠는가 말이다.

 

 열네살 아들을 불러 얘기했다.

"필규야, 이룸이는 아직 산타할아버지를 믿고 있어. 크리스마스 아침이면 머리맡에

선물이 있을거라고 믿는다고...

지난번에 지브리 선물들을 하나씩 받기는 했지만 이룸이를 실망시킬 수 없으니

여동생들이 좋아하는 실바니안 장난감 작은 거 하나씩 주려고 해.

너는.... 어떻할래?"

부모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냥 너는 좀 넘어가주라... 하는 부탁이었지만

아들은 빙글빙글 웃으며 얘기했다.

"저는 그냥 마블 만화책, 액스맨 시리즈 아무거나 하나 주시면되요.

아주 소박하죠? 크크"

이놈이 그냥...

 

그리하여 나는 남편에게 주문을 넣었다.

아들이 원하는 마블 만화책과 딸들을 위한 장난감 두개를 비밀리에 구입하라고 말이다.

 

다시 옷장 어느 구석엔가 쳐 박아두었던 성탄 선물용 커다란 양말들을 찾아야겠다.

산타인척 하면서 카드도 한장씩 써서 넣고, 선물도 넣어서 애들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머리맡에 두는 것이다.

 

산타 노릇은 끝난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면 막내가 있어 또 한번 산타가 될 수 있는 것도

고마운 일이지...싶다.

 

두 해 전인가 크리스마스 아침, 머리맡에 놓여있던 선물들을 보고 두 딸들이 놀라고

감탄하며 소리 지르던 모습이 떠오른다.

"언니, 산타가 다녀갔어. 내가 받고 싶은 선물을 어떻게 알았을까.

산타 할아버지 너무 고마우다, 언니야" 흥분한 막내는

창 밖을 보며 산타 할아버지 고맙습니다를 몇번이나 외치고 종일 그 기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산타 할아버지가 쓴 카드의 글씨체가 아빠 글씨체랑 똑같다는

오빠의 날카로운 지적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던 그 이쁘고 맑은 믿음에

우리 부부도 오래 즐겁고 기쁘지 않았던가.

 

세상이 험하고, 어른들이 저지른 잘못들은 너무나 추하고 부끄럽지만

그래서 자주 희망같은거.. 가질 수 있을까.. 좌절하기도 하지만

아직은 이렇게 맑은 아이들이 있으니, 다시 기운이 난다. 이 아이들을 꿈을 위해서

또 한번 늙은 산타가 될 수 있다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도

아직은 더 오래 슈퍼맨도, 배트맨도 되고 싶다.

 

남편은 퇴근길에 아이들이 부탁한 선물을 하서 차에 잘 숨겨 둘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성탄절에 먹고 싶다고 부탁한 음식들의 목록을 기억하며

슬슬 장 보러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늘 쓸쓸하게 지내는 남동생이 성탄절을 우리집에서 보내고 싶다고 해서

친정엄마와 함께 초대했다. 일곱으로 늘어난 대식구에게 맛난 성탄절 음식을

먹이는 수고는 늘었지만 내 집으로 가족들이 모이고, 작은 기대와 설렘

기쁨을 나눌 시간들을 생각하면 그 또한 감사한 일이다.

 

그래도, 아직은 산타를 믿는 마음들이 고맙다.

그래도, 아직은 산타를 할 수 있는 내 상황들도 고맙다.

내게 남편이 여전한 산타이듯, 올 성탄절엔 내가 남편의 산타도 되고 싶다.

 

사랑이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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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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