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연필~1.JPG

 

오랜만에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주문하러 들어갔다가 어른을 위한 '컬러링 북'에

꽂혔다. 온갖 모양의 근사한 색칠책이 다양하게 나와 있었다.

요즘 유행인 듯 했다.

아프리카, 동물, 정원, 여행, 전통, 환상... 등등 다양한 주제별로 아름다운

일러스트들이 펼쳐져 있는 색칠책들을 훑어 보다가 나와 아이들을 위해

네 권을 주문했다.

딸들이야 워낙 색칠을 좋아하고 아들도 작고 섬세한 그림을 그려대는 녀석이니

좋아할 것 같았다. 나도 한때는 그림에 소질있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혼자서 여행다닐때도 수첩 한 귀퉁이에 펜으로 풍경들을 스케치하던 젊은날이

생각났다. 가끔 뭔가를 그리고 싶은 순간이 있지.. 그래.. 오랜만에 나도

색칠을 해 볼까.

 

며칠 후 색칠책이 도착하자 아이들은 열광했다.

색칠을 시작하기 전에 집안을  뒤져서 굴러다니는 색연필들을 모두 찾아냈다.

뭉툭한 것들을 새로 깎아서 날렵하게 만드는데도 적지않은 공을 들여야 했다.

내가 주문한 책은 '비밀의 정원'이란 주제로 온갖 섬세한 식물들이 그려져 있는

책이었다. 막상 색을 칠하려고 하니 너무나 작고 세밀한 그림들이라서 쉽지

않았다.

그래도 마치 소녀시절에 읽었던 순정만화의 한 페이지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정원들을 그린 그림들을 보고 있자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것 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색연필이 가득 담긴 종이 상자를 뒤적거리며 적당한 색을 찾고

정성들여 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필요한 색이 없기도 하고 색연필로는 표현이 어렵게

섬세한 그림이 있어서 싸인펜도 필요하고, 색칠을 시작하고 보니 이런 저런

불편함이 생겼다.

이런, 이런... 일러스트 전용 펜이 따로 있는 건가? 어쩐지 인터넷에 떠 있는

색칠 사진들은 깜짝 놀랄만큼 정교하고 화려하던데 전문가들이 칠 했겠지.

나는 생각만큼 이쁘게 표현이 안 되는 것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색연필 탓이라고

불평을 했다.

모처럼 스트레스도 풀고 마음의 여유를 좀 누려보고 싶어서 주문했는데 이것도

맘대로 되지 않는구나... 안 하던 것을 하려니까  허리도 아프고, 눈도 침침하고

색연필을 쥔 손도 아프네...

이러쿵 저러쿵 불평하며 조금 색칠하느 시늉을 하다가 밀어 두었는데

다음날 퇴근한 남편은 나를 부르더니 당신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아직 한참 남았는데 왠 크리스마스 선물?  별 기대도 안 하고 다가갔더니

남편은 출근 가방에서 수채화 색연필 세트와 싸인펜 세트를 꺼냈다.

 

"전문가용은 너무 비싸더라. 그래도 한 번 써봐. 당신 요즘 색칠한다며..."

 

나는 쿡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마누라 색칠 잘 하라고 사온거야?"

"색연필이 나빠서 색칠이 잘 안된다면서..."

 

애들이 달려와 환호성을 질렀다.

"이거, 엄마 선물이야. 엄마한테 빌려써"

남편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일렀다.

아이들은 내 곁에 몰려들어 같이 색칠하자고 난리였다.

 

한번도 안 쓴 고운 색들이 가지런히 담겨있는 색연필 통을 열었다.

빙그레 미소가 나왔다.

한참 동안 아이들과 즐겁게 색칠을 했다. 수채화 색연필로 칠하고

전용붓에 물을 묻혀 쓱쓱 문지르면 부드럽고 이쁘게 색이 번졌다.

 

여기도 아프네, 저기도 아프네, 애들이 말을 안 듣네 하며 퇴근한

남편에게 불평하고 애들에게 툭 하면 화를 내는 마누라가  모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려는 것을 남편은 응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소한 일이라도 아내가 즐거워하고, 편안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이

남편도 좋았으리라.

그래서 이런 선물로 아내의 마음을 조금 더 기쁘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들과 모여앉아 이쁜 색깔로 색칠을 하며 나는 좀

울고 싶었다.

즐겁게 사는게 별게 아닌데, 그동안 나는 남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예민하고 날카롭게 굴면서 나를 혼내왔었구나.

 

내%20~1.JPG

 

아름다운 꽃과 싱그런 나뭇잎들과 나무와 새들을 정성껏 칠하면서 마음은

다시 어려져 안소니가 가꾸는 정원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육신의 나이가 뭐가 중요할까. 내 안에는 여전히 안소니의 장미정원에 설레는

어린 소녀가 살고 있는데...

가끔 이렇게 작고 사소한 일들 속에 몸과 마음을 기울여가며 내 안의 아이를

돌보고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하는 일.. 어렵지 않구나. 그저 잠깐 아름다운 색에

둘러쌓여 아이들과 색칠을 하는 시간만으로도 충분한 것을..

 

남편이 출근하고 두 아이가 학교에 가고 나면 나와 막내만 남은 집에서

오전에 한 시간쯤, 집안일을 다 미루어두고 나는  색칠을 한다.

남편이 선물해준 색연필과 싸인펜을 몽땅 꺼내 늘어놓고 그림에 어울리는 색을

고민하고 찾고 칠해가며 다른 것은 다 잊는다.

 

밖은 춥고, 세상은 다 얼어붙었고, 부엌이며 집안에는 내 손이 가야할 일 투성이지만

한 시간쯤 그것들을 다 잊는다해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닐텐데

보라색과 청녹색 사이에서 나는 다시 어린 소녀가 되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즐거워 지는 것이다.

 

이룸%2~1.JPG

 

어린 딸과 나란히 앉아 색칠을 하며 이른 아침 얼어붙은 마당을 가로질러

나갔을 남편과 눈 쌓인 언덕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던 큰 아이와 교문 앞에서

내게 손을 흔들며 총총히 걸어가던 둘째 아이를 생각한다.

자주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내가 살수 없는 존재들..

 

그러니까 내가 나를 더 잘 돌보고 더 잘 챙기고 나를 즐겁게 하는 일에 정성을 들여야지.

살다보면 아플때도 있고, 힘들때도 있지만 그래도 위로하고 힘을 주는 가족들이

있어 또 한 고비를 넘게 된다.

 

손끝에서 피어나는 고운 색처럼 오래 잿빛으로 칙칙하던 마음의 색도 화려하게

물드는 기분이다.

남편의 작은 선물이 얼어붙은 겨울을 행복하게 녹이고 있다.

 

명품백이나 값비싼 선물보다 그 사람의 마음 한 구석 10% 쯤 비어있는 곳을 채워주는

이런 따스한 관심과 배려..

나도 배워야지... 생각하면서 열심히 즐겁게 색칠하는 겨울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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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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