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전엔 육아서 우등생, 출산 후엔 열등생으로 바뀌어
알아서 잘 크더라는 대안적 육아철학서는 더 어렵네
내 자랑을 하자면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 잘하는 우등생이었다. 전과에 1+2=3이라고 적혀 있으면 이걸 대입해서 수련장에 있는 산수 문제들을 척척 풀었고, 에 sin²θ+cos²θ=1라고 적혀 있으면 또 부지런히 외워서 유제나 연습문제를 풀어제꼈다. 말하자면 말귀 잘 알아듣고 시키는 대로 잘하는 학생이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한지도 어언 20년. 이제 교과서가 제시하는 원칙과 법칙과 실전 문제에서 벗어날 때도 됐건만 지금의 상태는 실력 정석 벡터 챕터의 연습문제 8번에 발목잡혀 허우적거리는 모양새다. 아니 아니 1장 집합 부분의 기본 문제도 못 풀어서 쩔쩔매는 열등생이 된 것 같다. 정석보다도 성문종합영어보다도 23856배 어려운 육아책 때문이다.
» 출산 전 탐독했으나 실전 육아 적용에서는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육아책들
육아책은 죄가 없다. 내가 특히 쥐약인 한자가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4자성어는 눈씻고 찾아도 몇 개 없다. 출산 전 친한 친구가 “정작 애 낳으면 읽을 시간 없으니 미리미리 읽어두라”고 잔뜩 안겨준 육아책들을 읽을 때 세상에 이것보다 술술 읽히는 책이 있으랴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 태어날 아이에게 시뮬레이션도 해보고 나름의 육아원칙을 세워보는 것이 나의 유일한 태교활동이었다.
독자 여러분도 알다시피 일찌기 출산 직후 ‘글로 배운’ 모유수유에 실패를 통해 육아책 실전학습에 급좌절했던 바, 나는 지금도 육아책 실전학습에는 열등생을 면치 못하고 있다. 우선 수면훈련. 아기 키우는 집에 한 권씩 다 있는 의 저자는 생후 3,4개월부터 수면 훈련 시키기를 권한다. 모유수유 실전에서 실패한 나는 ‘4개월만 돼봐라’라고 벼르며 육아책 우등생으로 거듭날 기회만 노렸건만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책에서 가르치는 대로 아이를 재워본 적 없다. 혼자 자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책에서는 눕혀서 토닥인다-울면 안아준다-울음을 그치면 다시 눕힌다-다시 울면 다시 안아준다-를 반복하라고 나와 있다. 하지만 등센서에서 쭈쭈 센서로 갈아탄 아이는 젖을 물지 않으면 밤새도록 자지 않는다. 게다가 요령까지 생겨 ‘엄마 신경을 최대한으로 자극하는 울음법’을 터득한 아이의 통곡소리를 듣다보면 수면훈련의 의지도 꺾이고 옆 집에서 신고 들어올까 두려워 젖을 물려 재운다.
카시트 문제도 마찬가지. ‘베위’와 양대산맥이라할 에서는 출산 후 퇴원 때 부터 카시트에 아기를 앉히라고 엄중히 지시한다. 그러나 요즘 카시트를 중고로 팔아야할지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카시트에 앉자마자 터지는 울음을 모른 체하고 5분 정도 달리면 아이와 차와 내가 동시에 폭발해버리지 않을까 하는 혼란과 공포 속에서 카시트 버클을 푼다. 내가 이겼지롱 하는 표정의 아기를 보면 한대 쥐어박고 싶지만 난 그저 백기를 흔들고 있는 초라한 육아책 열등생 엄마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제는 육아책 보는게 은근히 두려워질 지경이다. 또 뭘 잘못하고 있는 거지? 이렇게 불규칙적으로 애가 떼쓸 때마다 젖을 주면 안된다는데, 쇠고기 이유식을 시작할 때가 벌써 늦은 건 아닌가? 선생님한테 꾸중 받을까 전전긍긍하는 학생이 된 기분이랄까.
6개월간의 실전경험에서 기가 죽은 나는 육아책에 대해서 시니컬하게 변하기도 했다. 특히 기술적인 부분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육아철학서 같은 책을 보면 괜히 벌써부터 열등감에 시달리면서 적대적으로 변한다. 물론 지성을 갖춘 엄마로서 내가 보는 육아철학서들은 이나 류의 대안적인 관점의 책들이다. 선행학습, 조기유학 이런 치맛바람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키웠더니 알아서 잘 자라줬더라 하는 이야기들. 물론 저자들은 자식들이 일류대에 갔다는 것에 방점을 찍고 싶지는 않겠지만 평범하게 키워서 그야말로 평범하게 성장했다면 책을 낼 수도 없었을 테니 일류대 또는 번듯한 사회적 성공은 육아서의 기본 베이스다.
그러나 기지도 못하는 아이에게조차 뭔가를 교육하는 데 실패하면서 자신감을 급상실한 나는 이런 책들을 보면서 흥, 설마, 퍽이나 식의 자조 섞인 냉소를 날리고 있다. 교양과 양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 언니들은 날마다 사춘기 조카들과 소리 지르고 싸우거나 엄마가 믿어준 우리 조카는 게임질이나 하면서 밤을 새우는데 말이지 흥 이게 말이 돼? 이런 식으로 말이다.
침대 옆 협탁에 잔뜩 쌓여있다가 슬그머니 책상 아래 발치로 이사간 육아책들. 요즘은 개월 수에 따른 신체발달 상황 이나 예방접종 시기 정도만 종종 펴보고 있다. 모범생 출신으로 가끔 마음이 무거워지긴 한다. 그럴 때면 같은 지진아 친구들과 육아책 흠잡기에 나선다. “도대체 밤새 몇십번씩 아이를 눕혔다 안았다 하면서 재우는 게 가능해?” “저자 결국 암으로 세상 떠났잖아” “그치? 대충 재우는 게 암걸리는 것보다는 낫잖아?” 여우의 신포도처럼 흉을 보다보면 조금 위로가 된다. 어쩐지 더 찌질한 엄마가 되는 것 같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