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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 단체여행을 위해 자신의 건강을 날마다 체크해 기록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
  여행을 하는 주체는 자기자신이고, 자신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 책임감을 스스로 갖게 한다>



한 일본인 기자가 본 세월호 사고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그는 사건사고 현장을 취재보도하는 일본 방송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세월호 사고가 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진도에 머물며 현장을 지켜보고 있단다.
자신에게도 19살 딸이 있어 이번 사고가 너무 마음이 아팠다는 그의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어처구니없게 목숨을 잃은 아이들이 떠올라 다시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는 이번 사고에서 벌어진 여러 일들에 대해
'일본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놀라워했다.
위험한 사고는 어느 곳에서든 일어날 수 있지만, 그에 따른 대처는 각 나라마다 다를 것이다.
마침 요즘이 큰아이가 학교에서 단체여행을 준비하는 시기라
일본의 학교는 아이들의 단체여행을 어떻게 준비하는지 꼼꼼히 살펴 보았는데
이번 육아기는 그것에 대한 리포트가 될 것 같다.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딸아이는 다음주에 1박2일 수련회를 떠난다.
6학년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가는 시기에, 5학년 아이들은 숲 체험이나 별 관찰이 가능한
자연학습장을 가는데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처음으로 집을 떠나 숙박체험을 하는 것이다.

5월 말에 떠나는 이 여행을 위해,
학교는 한달 전인 4월 말쯤에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었다.
이 설명회 전에 5학년 담임 교사들이 함께 사전답사를 다녀왔고,
현지의 숙박지와 주변 자연학습장 사진자료를 보여주며 각 교사들이 돌아가며
자세히 설명하고 학부모들의 질문을 받아 답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평일 오후 3-4시쯤에 열린 행사였음에도,
5학년 학부모들이 거의 모두 참석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를 겪어온 탓인지, 일본의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생명이나 안전과 연관된 행사에는 관심과 참여도가 무척 높은 편이다.

학부모들에게 주어진 설명회 참고자료에는,
숙박지에 대한 자세한 안내와 여행준비물,
비상시에 각 가정과 24시간 연락이 가능한 전화번호,
아이가 지참할 비상약이나 알레르기의 여부,
지금까지의 병력을 꼼꼼하게 기록한 서류 등을 여행 전에 반드시 제출하라고 쓰여있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안전을 가장 중요시하지만, 만약의 경우 사고를 대비해
숙박지에는 간호사가 대기하고 있으며 긴급상황에는 구급차를 부르고
학부모에게 연락해 조치를 취하겠다는 설명이 있었다.
그리고 건강 면 뿐이 아니라, 고학년 아이들인 만큼 여행기간동안 일어날 수 있는
따돌림이나 이지메와 같은 정서적인 돌봄에도 주의깊게 살펴보겠다고 했고
혹시 아이가 힘들어 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언제든,
담임교사에게 알려주기를 신신당부했다.

여기까지가 단체여행을 위한 학교와 학부모들의 역할과 준비였다면,
이제부터는 아이들 스스로가 여행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부분들이다.
아이들 각자에게는 여행 전 일주일동안, 자신의 건강상태를 기록한 서류가 주어졌는데
아침저녁으로 체온, 기상/취침 시간과 수면의 질, 식욕의 정도, 배변,
전반적인 몸상태(콧물이 난다/목이아프다 등)을 꼼꼼하게 기록하게 했다.
이것은 여행 전에 긴장하거나 들뜬 아이들이 차분하게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관리하도록 하고
즐겁게 여행을 끝내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노력해야한다는
주체성을 갖게하는 기회가 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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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전 일주일 간의 건강기록부.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이 종이가 없으면
여행을 떠날 수 없고, 이것 자체가 당일 버스를 탈 수 있는 티켓이 된다며 아이들에게 강조했다>

아이들은 벌써 몇 달이나 이번 여행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행을 꼭 가고 싶으니, 날마다 체온을 재며 꼼꼼히 기록하고
식욕이나 건강 상태 정도를 아주 좋으면 동그라미 두 개, 보통이면 하나, 안 좋으면 세모로
표시하도록 되어있는데, 연필로 아주 진하게 동그라미 두 개를 매번 그려놓은 걸 보니
어찌나 우습던지. 마치 굵게 칠한 동그라미 두 개가
"나는 이렇게 건강하니, 여행갈 자격 충분히 있어요!"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이는 여행을 준비하는 이번주 내내 아침에는 한번도 깨운 적이 없이
스스로 7시, 혹은 좀 더 빨리 일어나고 잠드는 시간도 평소보다
30분 더 이른 9시에 꼬박꼬박 잠들었다.

엄마들 사이에서는, 이거 여행 때만 말고도 평소에도 쭉 하면 좋겠다는
수근거림이 있을 정도로 아주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담임교사와 함께 여행 실행위원회를 스스로 꾸려 각자 역할을 나눠 맡아
연습하고 있다. 아이들 각자가 여행기간 동안 맡은 역할이 있는데
우리집 아이는 자기 팀의 '보건' 담당인데, 몸이 안 좋은 친구가 있는지 잘 살펴보고
문제가 있을 때 얼른 선생님께 알리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이렇게 자신이 맡은 책임을 완수함으로써 마음껏 즐길 자유를 얻는다.
카레라이스, 스파게티, 우동, 돈까스 정식 등의 저녁 메뉴 중에서 뭘 고를까
즐거운 고민에 빠지고, 아침 식사는 빵이 좋을까 밥이 좋을까 날마다 이랬다저랬다..
친한 친구와 한 방에 잘 수 있게 되었다며 환호성을 지르고
저녁을 먹고 난 뒤의 댄스 타임을 위해 아이들 스스로가 곡 선정과
춤 연습을 하거나 DJ를 맡아 맹연습 중이다.
한밤중 베개싸움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도..^^

숲 관찰이나 놀이 때의 안전교육과 건강관리를 당부하는
교사들의 세뇌에 가까운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자신들이 학교와 가정을 벗어나 색다른 환경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이번 여행을
이토록 설레이며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을 보며
학교와 함께 학부모인 우리도 그런 아이들을 뒤에서 잘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겨우 1박2일 여행가면서 몇 달동안 이렇게 요란스러운가! 싶기도 하지만,
일본의 학교와 학생, 학부모 모두는 이것을 준비하는 과정 전체를 즐기면서 준비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이 과정 모두가 학교는 학교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연습과 공부가 된다는 걸, 일본인들은 이미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만약의 비상사태가 벌어질 때는
지금까지 준비해온 메뉴얼대로 침착하게 대응하게 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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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소풍이나 야외 나들이를 떠나는 뒷모습을 보는 엄마들의 마음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늘 기도하는 마음이다.
기대에 들떠 누구보다 행복해하며 집을 떠난 내 아이가,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부모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게 해서는 안된다.

"다녀오겠습니다!!"
기쁜 목소리로 길을 나서는 아이들의 미래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부모들이 좀 더 힘을 보탰으면 좋겠다. 학교와 함께 연대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기본을 지키는 성숙한 사회를 위해 함께 고민하고 행동하자.
아이들의 생명이 지켜져야
공부도 있고 성공도 있다.
이번 사고를 통해 배운 것을 오래도록 잊지말고 꼭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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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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