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는 좀 특별한 것 같아. 왜냐면 나는 유치원에서 키도 제일 작고, 그리고......”
지난 금요일, 텃밭에서 나는 열무를 뽑고 해람이는 벌레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열흘 만에 밭에 왔더니 할 일이 많았다. 아욱 따고 상추 솎고 열무 뽑고, 그 자리에 다시 열무씨와 들깨를 뿌리고, 가지와 파프리카에 지지대를 해주고, 날이 가물어 메마른 땅에 물도 흠뻑 주어야 하리라. 한낮의 뜨거움을 피해 서둘러 온다고 했으나 해는 벌써 머리 위에서 내리쬐고 있었다. 부산을 떨며 바쁘게 손을 놀리는데 무심코 던진 해람이의 말이 마음을 울리고 일손을 멈추게 했다.

또래보다 작은 아이,
괜찮다, 괜찮아, 걱정스러운 내 마음 단속하느라 애를 썼지만, 유치원 끝나서 달려나올 때 머리 하나만큼 더 커 보이는 친구들 틈에서 유난히 작은 아이를 보면 마음이 쓰이곤 했다. 어려서부터 아토피와 알레르기로 밤잠 설치던 것이 떠올라 안타깝고 입맛 까다로운 아이를 잘 먹이지 못한 내 탓인 것 같아 미안했다.
그런데 해람이는 키 작은 게 부끄럽거나 나쁘지 않고 ‘특별하다.’고 여기다니, 얼마나 신통하고 대견한지!

“그리고 또 뭐가 특별한데?”
“음, 까먹었어. 조금 전에 생각났었는데, 그건 까먹었어.”
해람이가 어떤 말을 이어갈지 몹시 궁금하고 기대가 되었는데 아이는 벌써 다른 관심거리를 찾은 듯했다. 내가 너무 호들갑을 떨면 아이가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말을 떠올리지 못할 것 같아 더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특별해.’라는 해람이 말이 되짚어 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하게 느껴져 지난밤 ‘잠자리 토크’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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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아이들과 잠자리에 누워 이야기를 나눈다. 자장가 부르기, 다리 주무르기, 숫자 세기,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던 아이들 재우는 의식이 언젠가부터 ‘이야기’로 자리 잡았다.
아루는 학교에 다니고 해람이는 유치원에 다니고, 그러면서 나도 이런저런 모임과 활동이 많아졌다. ‘잠자리 토크’는 낮에 누굴 만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로에게 이야기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엄마가 만난 그 선생님은 어떻게 생겼어? 얼굴이 세모야, 네모야?” 나는 낮에 있었던 일 중에서 좀 ‘교육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으나 진지한 이야기를 할라치면 아이들의 엉뚱한 질문에 금세 웃음바다가 돼버린다. 한 번 웃음이 터지면, “내가 더 웃긴 이야기 해줄게.”라며 서로 이야기 바통을 잡겠다고 난리 법석이 된다.

“그만 떠들고 조용히 하면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게.”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또 다른 이야기 카드를 꺼낸다. 아이들에게 ‘이야기’는 마법의 주문 같다. 어느새 순한 양처럼 조용히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인다. 어릴 때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아라비안나이트나 안델센 동화, 그림 동화를 더듬더듬 기억해낸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뒤섞이기도 하는데 그러면 “엄마, 그거 ‘엄지 공주’ 각색한 거지?”라며 아루가 끼어든다. 이야기를 지어내다가 뒷수습이 안 되면 아이들이 이어받아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이야기 주인공이 되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한다. 해람이는 귀신이나 괴물이 나오는 모험을 좋아하고 아루는 밝고 따듯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엄마의 이야기 밑천이 떨어지자 아루가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아루가 즐겨 읽는 옛이야기, 개똥이네 놀이터에 나오는 창작 동화나 만화 등을 기억해 두었다가 이야기한다. 학교 독서 시간에 읽은 ‘뮬란’은 스토리가 복잡하고 길어서 포스트잇에 메모를 해오기도 했다.

해람이는 더 놀겠다고 떼를 쓰다가도 누나가 이야기 시작한다고 하면 쪼르르 달려온다. 모두가 수다스러워서 신 나게 떠들다 보면 한 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하니, ‘잠자리 토크’가 ‘재우기 의식’으로 괜찮은 방법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하루 일을 함께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이 시간이 참 즐겁고 소중하다. ‘오늘 밤에 무슨 이야기를 할까?’ 각자가 말하는 이, 듣는 이가 되어 이야기를 준비하고 기대하며 이 시간을 기다린다.

 

 

지난밤에는 ‘특별한 나!’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해람이가 ‘키가 작고 그리고...’ 이어서 하려던 말이 계속 궁금했고 부모나 남들의 평가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돌아보면 좋을 것 같았다.

“우리 반에서 이름에 받침이 하나도 없는 애는 나밖에 없다.”
아루는 제일 먼저 자신의 특별함을 이름에서 찾았다. ‘아름다운 하루’ 특별한 뜻이 담긴 제 이름을 자랑스러워 했다.
‘나는 OOO을 잘해. ’ ‘나는 OOO을 좋아해.’ 예상했던 대로 이야기는 ‘특별한 나’의 장기 자랑으로 흘렀다.
“엄마는 뭐가 특별해?”
이야기 주제를 정한 건 나였지만, 막상 내 이야기를 하려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어색함을 감추고 ‘특별한 나’를 찾아내려 애를 썼다. 말하다 보니 점점 자신감이 생겨났다.

자신의 장점과 취향을 늘어놓다가 아루가 ‘왜 잘하는 것만 이야기하냐?’고 따지면서 부족한 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는 일곱 살인데 글을 못 읽는다.” 해람이가 말하니
“나는 세 자리 수 받아 내림 뺄셈을 잘 못하는데.” 아루가 받았다.
못 하는 것도 ‘특별함’으로 이야기하니까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잘한다, 못한다, 좋다, 나쁘다, 어떤 잣대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의 ‘특성’으로 생각하니까 다르게 보였다.

일곱 살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시기라더니 ‘특별한 나’에 대해서는 해람이가 할 말이 많았는데 해람이의 한 마디로 이 이야기는 끝이 났다.

 

“나는 진짜 특별해, 왜냐면 나는 나라서!”

 

나는 나라서 특별하다니, 광고 카피 같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해람이가 참 부러웠다. 나도 이런 생각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지.
그리고 다음에는 상대방의 특별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 다른 사람의 특별함을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보면 서로 '다름'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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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아이들과 지하철을 타고 도심으로 나갔다.

토요일엔 아빠랑 촛불 집회, 일요일엔 엄마랑 만민공동회 갔다가 청계천에서 놀았다.

이렇게  '특별한' 아이들을 그렇게 무참히 잃었다는 사실이 참 슬프다. 기가 막힌다.

일요일은 5.18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의 시신이 탈취됐다는 소식이 들렸고

광화문 네거리 2층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가만히 있으라' 침묵 시위대가 경찰에 겹겹이 둘러 싸이는 것을 보았다. 자정 무렵 전원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잊지않겠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청와대 홈피에 침묵 시위를 제안했던 용혜원씨가 잡혀가며 페북에 남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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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진향
사진으로 만난 남편과 408일간 세계일주를 했다. 서로에게 올인해 인생을 두 배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둘이 넷이 되었고, 현재를 천천히 음미하며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돈 벌기 보다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아루(아름다운 하루), 해람(해맑은 사람)과 함께 자연과 사람을 만나며 분주한 세상 속을 느릿느릿 걷는다. 2012년 겨울, 49일동안 네 식구 말레이시아를 여행하고 왔다. 도시텃밭에서 농사를 짓고, 사진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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