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이 돌아왔다>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지적하신
이정희 선생님의 칼럼을 읽고,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와 이 글을 쓴다.
나는 사실, 아빠들의 육아를 다룬 이 프로그램을 제대로 보진 못했는데
여기저기서 소개되는 내용들을 볼 때마다 뭔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는 걸 느끼곤 했다.
그 이유를 베이비트리에 실린 이정희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좀 더 정확하게 알게 된 것 같다.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아빠의 육아를 관찰하며 진심으로
공감한 시청자라면 아빠육아의 좀 더 본질적인 부분을 따라해보려는 노력이 먼저이지 않을까?
그들이 사용하는 최신 육아 상품을 우리집에도 사들이면,
추사랑네같은 귀엽고 행복한 육아가 금방 완성되는 걸까?
아마 나의 짐작에 불과하겠지만, 추사랑네의 육아풍경이 일본 사회에서도 방영된다면
배경으로 등장하는 육아 상품들이 한국처럼 단숨에 완판되거나 하는 일은 없지 싶다.
칼럼 내용대로 각종 육아 히트상품들이 일시적 효과나 일시적 안심용이 되어줄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의 건강한 발달에 어느 정도 기여할까에 대해선 선뜻 대답하기 힘들 것 같다.

 

이렇게 부모들이 새로운 육아 상품과 각종 교구, 영유아 발달검사 등에 집착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첫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12살이 된 지금도 나는,
가끔은 도대체 어떻게 키워야할지 몰라 두렵고, 앞으로 갈 길은 늘 안개가 끼인 듯 뿌옇게만 보이는데
이제 겨우 2,3살 어린 아이를 둔 엄마들은 오죽할까.
그런데 ..
좀 엉뚱한 제안이 될지 모르지만, 혹시 아이를 키우면서 두려워질 때가 있다면
새로운 육아 상품이나 교구 대신, 아이와 함께 식물을 키워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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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이가 막 말을 시작할 때 즈음, 그러니까 벌써 10년 가까이 된 것 같다.
화분에 꽃이나 채소를 키우기 시작한 게.
그때 나는 식물이나 원예에 대해 완전 까막눈인 왕초보인데다
작은 아파트에서 시작한 살림에도 서툴 때라 2,3개밖에 안되는 화분을 집에 두는 것도
무척 부담스러웠다. 원예 강사 일을 하던 지인이, 아이를 위해서도 식물을 꼭 키워보라며
반강제로 꽃 모종이나 씨앗, 화분, 흙 같은 걸 틈날 때마다 안겨주곤 했지만
처음 아이키우는 일도 서툴고 벅찬데, 화분들까지 돌봐야한다 생각하니 늘 귀찮기만 했다.
그래도 아이는 밖에 나가지 않아도, 물놀이하듯 꽃이나 채소 모종 곁에서
한참을 잘 놀았는데 그때는 그냥 그 정도로 만족했던 것 같다.

 

시작은 그렇게 참 미미했는데, 둘째가 태어나고 두 아이를 키우는 동안
이 식물키우기는 나의 육아, 일상, 삶을 바라보는 관점 모두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해가 더해갈수록 아파트 베란다의 절반을 점령하다시피 화분 수가 늘어가다,
결국 마당있는 집을 동경하게 되었고 오랜 망설임끝에 지난해는 주택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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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식물들을 만지고 있다보면, 참 신기한 게
아이를 키우면서 겪는 두려움이 서서히 걷히는 기분이 든다는 사실이다.
아니, 육아 뿐 아니라 사람과 자연, 세상과 삶에 대해서도 자주 배우고 깨닫게 된다.
바로 위 사진은, 작년 늦가을 마당에 심은 튤립 구근에서 잎이 자라고 있는 모습인데
머잖아 곧 우아하고 이쁜 튤립꽃을 볼거라 식구들 모두가 설레이며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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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뿌리 식물인 튤립 구근은 이렇게 작은 양파처럼 생겼는데
11월쯤에 땅 속에 심은 뒤, 4개월 정도는 아무런 변화도 보여주지 않는다.
심었는지 잊어버리고 있을 즈음, 꽃샘 추위가 시작되는 3월에야 겨우 초록 잎을 쏘옥 내민다.
구근 식물을 처음 키웠을 땐, 너무 궁금하고 답답했다.
남들은 봄까지 기다리면 다 피게 되어있다고 하는데, 열심히 물을 주고 기다려도
흙 위로는 아무 변화도 없으니
'내가 잘 심은 건가??' '너무 깊이 심은 건 아닌가?' 하며  살짝 땅 속을 파보기도 하고,
'역시 뭔가 잘못된 거 같애. 새로 사서 심을까? 아님, 비료를 듬뿍 뿌려줘 볼까?' ...
그러니까, 나는 두려웠던 거다. 씨앗을 사서 뿌리고 보살핀, 오랫동안의 나의 투자와 노력이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할까봐 조바심이 나고 마음이 급했다.
실패하는 게 싫었고, 남들처럼 이쁘게 못 키울까 신경이 곤두서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육아도 비슷한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때가 되면 싹을 틔우고 쑥쑥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까지 맺을 거란 경험과 확신이 없으니,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될 것 같고, 좀 더 내가 가진 것을 투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식물들이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며 건강하게 잘 자라기 위해선
땅 속에서 충분히 잠드는 시간이 필요하다.
식물에겐 그런 시간이, 인간에겐 유아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 부모들은 땅위의 보이는 곳에만 관심이 있을 뿐
땅 속의 일들은 알지도 못할 뿐더러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촉촉하고 따뜻한 흙 속에서 충분한 수분과 영양을 흡수하며 쉬어야 할 씨앗에게,
장사꾼들이 선전하는 최신 비료들을 사들여 듬뿍 뿌려주며 바로바로 효과를 기대한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싹을 틔우기도 전에 씨앗은 썩어버리고 말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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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던 일이 잘 안되면 금방 싫증을 내고 마는 나는, 그렇게 해서
수많은 꽃과 채소를 망치고 그 실패감에 가끔은 식물들을 멀리하고 살기도 했다.
띄엄띄엄 해 왔던 식물키우기이고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이제 조금은 요령이 생겼다.
알고 나니 덜 두렵고, 자신감이 생기면서 잘 키워야겠다는 욕심보다
이 꽃은, 이 씨앗은 어떤 성질을 가졌나, 어떤 환경을 좋아하나, 하며 먼저 잘 살펴본다.
지켜보고 기다리면서 도움이 필요할 때 적절한 조치를 해 주면, 대부분의 식물들은 내 기대보다
더 찬란한 기쁨을 안겨준다. 현관 앞에 심어키운 꽃들을 보며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두 행복해하고, 잘 자라줄까 걱정에 끙끙댔던 초보 시절에 비해 요즘은
옆에 있는 꽃과의 색깔 조화나 전체 분위기까지 미리 구상해서 심기도 한다.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이렇게 다채로운 색채를 내면에 채워가게 한다면
얼마나 멋진 사람이 될까 .. 흙을 만질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1만 시간의 법칙이라 했던가.
건성건성했지만 원예 일도 10년쯤 하고나니 요즘은 뭔가 자유롭고 무엇보다 즐겁다.
아이들을 키우다 머리가 복잡해질 때마다, 장갑을 끼고 흙과 식물을 만지곤 하는데
몸은 피곤하지만 늘 생각이 정리되면서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에 조금은 여유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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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함께 10여년 동안 식물을 가까이 하고 살았던 큰아이에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자연을 대할 때 관념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실제로,
자기 눈으로 꼼꼼히 관찰하는 편이라 할까 ..
초등3,4학년 때 아이가 나무를 관찰하며 자기의 느낌을 더해 그린 그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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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막연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다 효과도 확실할지 모르는 식물키우기지만,
속는셈치고 한번 해 보길 권한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아이와 처음 방울토마토를 화분에 키워 심은 얼마 뒤,
노랗고 작은 꽃이 떨어진 자리에 아주 작디작은 아기 토마토가 맺혔을 때
아이와 나는 얼마나 기뻤던지!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것 마냥 신기해서 가슴이 뛰었다.
그때 내 뱃속에는 둘째가 막 발차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눈에 보일락말락하는 작은 씨앗 하나 속에 이런 힘이 숨어있었다니..

 

겨울 내내 휴면기를 보냈던 땅과 나무와 꽃들이 날마다 기지개를 조금씩 펴고 있는 4월이다.
이번 주말에는 아이들과 화원으로 나들이를 해보는 건 어떨까.
화분 하나에 방울토마토 모종을 심어 키우면 여름까지 성장을 지켜보며 즐길 수 있다.
그리고 토마토가 끝난 뒤, 늦가을이 되면 같은 화분에 튤립 구근을 몇 개 심어보자.
2015년 이맘 때가 되면 튤립 꽃이 피는 걸 아이들과 지켜볼 수 있다.
식물이 자라는 걸 기다리면서 관련 그림책이나 도감을 찾아보는 즐거움도 잊지말길.

식물이든 사람이든, 우리 모두가 자연의 일부라는 것, 아이들 속에 깃든 생명성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자연에 대해 알기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정신적인 의미에서 좀 더 진화한다면,

산부인과나 동사무소에서 임신한 부부에게 식물 모종이 든 작은 화분을 선물로 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어떤 원예 전문가의 조언.
"식물을 키울 때 가장 중요한 건 햇빛과 배수, 공기예요.
햇빛도 충분히 보고 물도 잘 주는데, 식물이 죽는 이유는
공기의 흐름이 좋지않은 곳에 있어서 그런 이유가 많아요."

 

아파트에서는 식물키우기가 쉽지않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야심차게 시작해보지만
막상 해 보면 역시 그렇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한번쯤은 해 보자.
'식물이 죽을 만큼 공기의 흐름이 좋지않은 곳에서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마당이 있는 주택에서 살 순 없지만, 화분 하나를 키워보며
오랫동안 이어진 우리의 아파트 생활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봐도 좋을 듯 하다.

생활이 편리하고 세련되어진 만큼, 자연과는 점점 단절된 일상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그렇게 태어나 자란 아이들이 지금은 부모 세대가 되었다.
모두들 똑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다보니,
취향도 욕망도 두려움도 서로 비슷해져 가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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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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