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둑한 지갑은 아니었지만 집에 두고 왔다.
그 사실을 어리목 휴게소 입구에서 알게 되었다.
“어, 지갑이 없네. 잠시만요”
주차비용 1800원을 차에 있는 동전으로 겨우 냈다.
‘이게 뭐람. 비도 오는데...’
가을비가 단풍을 시샘하는듯 1100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점점 거세지더니
어리목에 도착하니 비가 옆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어승생악까지 가는데 얼마 정도 걸릴까요?”
방금 거길 올랐다가 내려온 분이
“기상이 너무 안좋아서요. 아이 데리고는 못 올라갑니다”
라고 조언을 해준다.
<어리목. 날은 춥고 비는 옆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이 길을 가야할까?>
‘비는 오고 지갑에 돈은 없고.. 그냥 내려갈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게는 차안의 식량과 1100도로 아래의 서귀포 드라이브가 기다리고 있었다.
맛있는 것은 사먹을 수 없지만 뽀뇨랑 천천히 달려봐야지.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한 뽀뇨.
아빠랑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들다 보니 주말에는 매주 짧은 여행을 다니고 있다.
얼마 전엔 뽀뇨와 함께 성산일출봉을 올랐는데
‘이제 그만 내려가자는 아빠’와 ‘아빠, 조금만 더 올라가자는 4살 딸아이’가
서로 고집을 피우다 결국 정상을 오르기도 했다.
하여 이번 주에도 비가 오지만 결국 밖을 나선 것이다.
<아빠를 데리고(?) 성산일출봉에 오른 뽀뇨>
특별한 목적지가 있기 보다는 단풍을 보고싶어 한라산 1100도로로 갔고
돈이 없다보니 산남지역에 돈이 들지 않는 곳만 골라서 찾게 되었다.
한참 비가 왔지만 1100도로 서귀포방향에서 전망 좋기로 유명한 거린사슴전망대도 살짝 내렸다가,
비가 와야지 진가를 느낄 수 있는 곳인 엉또폭포도 들렀다.
폭포 구경한다고 뽀뇨에게 자랑을 했는데 멀리서 봐도 물줄기가 보이지 않는 엉또..
비 오는데 왜 물줄기가 없나 폭포 앞까지 갔지만 ‘70미리 이상 강수량에서만 폭포수를 볼 수 있다’는 게시 글만 보고 내려온다.
분명 아쉽긴 했지만 장대한 절벽과 그 위의 난대림이 비 온뒤의 엉또를 충분히 상상하게 하였고
누구 말마따나 ‘세계 3대 폭포(?)’에 들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뽀뇨, 내년에 우리 이사 오면 자주오자”
라고 얘길하며 서둘러 내려왔다.
아침에 챙겨온 귤, 사과, 고구마도 일찌감치 떨어지고 배가 출출해질 즈음 약천사를 찾았다.
뽀뇨가 바다가 보고싶다고 하기도 했지만(약천사 경내에선 바다가 보인다)
얼마전 돌아가신 지인의 명복을 빌어주고 싶어 굳이 찾았다.
절을 하며 명복을 빌 때 쌀을 사서 올려두고 싶었는데 거의 만원 돈인지라 그마저도 못하고
여기저기 눈요기꺼리로 신기해하는 뽀뇨를 잡으러 다니느러 한참을 보냈다.
<바다가 보이는 절, 뽀뇨가 처음 경험한 절이라는 곳은 어땠을까?>
“뽀뇨, 어서 가자. 엄마가 집에서 기다려”
라고 했지만 뽀뇨는 갈 생각이 없고 나도 구태여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어딘가에서 우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텐데 뭐’라는 생각이 드니 더 느긋해졌다.
하지만 아빠를 재촉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시장기였다.
점심도 굶고 챙겨온 식량도 모두 소진되다 보니 절간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다를 보여 달라는 뽀뇨를 데리고 급히 찾은 곳이 중문관광단지 내의 한 편의점.
사발면이라도 사먹기 위해서다.
너무 출출한데 남은 돈을 보니 1800원 정도.
50원짜리 동전까지 계산대 앞에서 꺼내 겨우 사발면 2개를 살 수 있었다.
뜨거운 물을 받아서 아이와 기다리는데 약간의 주변 의식.
‘왠 아빠가 엄마도 없이 나타나 아이에게 라면을 사 먹인담..’
눈치가 조금 보이긴 했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정신없이 우리들은 라면을 먹었다.
뽀뇨가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사발면 하나를 거의 다 먹었는데
‘한 젓가락만 하자’는 아빠를 단호히 물리쳤다.
“아빠, 이거 내꺼야. 먹지마”.
<남들은 한라산 정상에서 먹는 사발면이 제일 맛있다고 했는데 나는 이날 뽀뇨와 먹은 사발면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다>
밖에 비는 계속 내리고 가지고 있는 돈은 단 한 푼도 없지만
아이가 곁에 있어서 너무 행복한 하루다.
굳이 비싼 돈과 시간을 내어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내지 않는 여행지를 찾아다니며
집에서 싸온 음식과 라면까지 사먹는 소중한 추억을 남긴 것이다.
아빠에겐 뽀뇨가 성산일출봉을 앞서 오른 일만큼이나 기억에 남는데 뽀뇨는 어땠을까?
비가 와서 단풍구경을 하지 못한 어리목과 오르지 못한 어승생악,
물줄기가 없는 엉또폭포와 편의점에서의 사발면 식사..
그리고 약천사에서의 하릴없는 방황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