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운전을 한 지 15년쯤 됐으니까
15년만에 처음이었다.
아빠나 다른 어른 없이 두 어린 손자손녀만 데리고
장거리 여행을 한 것이.
한참 일하느라 정신없는 딸을 찾아온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없는 후회, 자괴감, 달라지고 사라져가고
허망하기만 한 중년의 시간들.
그들이 가고 난 뒤,
하도 많이 가져오는 통에 늘 두세번은 더 먹게 되는
엄마가 직접 기른 상추와 고수, 배춧잎을 식탁에 죄다 늘어놓았다.
그리고 역시 하도 많아서 다 먹지 못했던 삼겹살을 또 구워 먹으며
우리 부부는 고백성사의 시간을 가졌다.
왜 좀 더 너그럽지 못했을까.
일곱살 네살 밖에 안 된 조카들이
밥상에서 딴짓을 할 때마다 호되게 나무랐고
바쁠 때 이모이모 부르면 미간부터 찌푸려졌다.
아이 셋은 도저히 못 키우겠구나 싶었다.
토끼똥을 치우는 엄마에게
알아서 할 테니 그냥 놔두라고 신경질을 냈고
혜민 스님 글이 참 좋더라는,
곧 첫 책을 출간하는 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꺼낸 말에
맞아 참 좋지 하고 끝내면 될 걸
굳이 자기계발서 일색인 출판 시장이 마음에 안 든다느니
아이를 낳고나서야 세상을 알겠다느니 하며 딴지를 걸었다.
나 쉬라고 준영이를 업고 두 꼬마 손을 잡고 나가
우렁을 잡고 있다며 신이 나서 전화를 한 엄마에게
준영이 얼굴 타는데 모자는 왜 안 가져갔느냐는 헛소리나 해대고...
그래도 사진 속의 우리는 즐겁고 행복했다.
이모집에서는 왜 이렇게 줄넘기가 잘 되느냐며 호들갑이던 아이,
힘아리 없는 태권도 시범에 눈물 콧물을 쏟으며 웃었고
오빠 하는대로 따라하고 싶고
어린 사촌동생보다 더 이쁨받고 싶은 여자아이의 귀여움이란!
나는 그녀와 여러번 댄스타임을 가졌다.
엄마는 3일분치 약이 900원 밖에 안 하는
면 보건소에 감탄하며 장염, 비염 약을 지었고
아이들은 초등학교 놀이터(의 또래아이들)와
우리집 강아지 따식이와 은행잎을 좋아했다.
아이스크림 하나씩 손에 쥐고 쓸쓸한 가을 논두렁도 걸었다.
준영이만한 초대형 호박을 발견했고
엄만 어떻게 씨를 구할 수 없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이스크림 먹다 여기저기가 지저분해진 아이들.
노인정 수돗가에서 씻기다 잘못해서
여자아이의 구두에 물이 들어가는 바라에 또 한바탕 웃음 보따리.
엄만 이 와중에 집 옆에 있는 농협에서 씨를 사다가
텃밭에 시금치와 상추도 심었다.
칼집이 들어간 벌집 삼겹살과 소불고기
김밥 오뎅탕 감자볶음 스파게티
엄마표 수제비와 국수, 삶은 고구마와 밤을 먹었다.
가깝게 지내는 동네 어른 집에도 놀러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몇시간 전,
남편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거실에 앉아 있던 엄마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해줄 수 없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었다.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자고 온 몸이 골골거리는 엄마가
무척 안쓰럽고 걱정이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내가 울면 엄마는 더 울 테니까.
부디 잘 이겨내기를,
우리를 키워낸 그 강인함을 기억해 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고기를 다 먹은 뒤 그들과 통화를 했다.
엄마의 목소리가 밝았고
조카들은 또 놀러오고 싶다고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아마 엄마가 이 글을 본다면
"좋은 것만 생각하자.
니 마음 다 알고 있었고 말 안해도 다 알지." 하시겠지.
나는 언제나 엄마에게 후회없이 잘 할 수 있을까?
평생 그런 날이 오긴 할까?
엄마가 좋아하는 옥수수를 쪄서
밤새 수다를 떨고 싶었는데.
힘들때 나를, 우리를 찾아와줘서 고맙다는 말은
정작 꺼내지도 못했는데...
언제나 그립고
언제나 고맙고
사랑하는 우리 엄마가 무척 보고싶은 새벽이다.
엄마, 나 다음엔 좀 더 잘 할 수 있겠지?
엄마, 그때까지 기다려 줄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