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15_01.jpg » 후크 선장. 한겨레 자료 사진. 

 

만화 <짱구는 못말려>에서 짱구의 유치원 친구인 유리(일본명 네네)는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소꿉놀이’를 바란다. 함께 소꿉놀이를 하던 친구들이 응해주지 않으면 짜증을 부린다. 유리의 소꿉놀이에선 ①매일같이 늦게 들어오면서 집안 살림을 신경쓰지 않는 아빠 ②그런 아빠에게 매서운 눈초리로 화를 내는 엄마 ③그런 부부 사이에서 속상해 하는 아이 등의 역할이 실감나게 묘사돼야 했다.

 

‘고작 소꿉놀이 따위’에 짱구와 철수, 훈이 같은 주인공들이 유리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그저 재미있었다. 십수년 전 대학 시절, 이 만화가 국내에 처음 소개됐을 때 낄낄대며 탐독했던 그때의 나는 ‘뭐 이런 애들이 다 있어’라는 심정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땐 뭘 몰랐다. 아이들은 정말로 ‘리얼리티가 있는 놀이’를 추구한다.

 

어느날 아내가 큰아이와 뮤지컬 <피터팬>을 보고 왔다고 했다. 아이가 무척 재미있어했다고 했다. 포스터 앞에서 찍은 사진도 보내왔다. 흐뭇한 ‘아빠 웃음’을 짓는 것도 잠시, 나는 다시 바쁜 일상 속으로 파묻혔다. 며칠 뒤 주말 아침 달콤한 늦잠에 빠져있는데 잠결에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크선장 받아라!” 뭔가 뾰족한 물체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깨기 싫은 심정에 실눈을 떠서 보니 큰아이가 장난감 칼로 나를 찌르고 있었다. 한바퀴 돌면서 칼을 휘두르더니 내 허벅지도 때렸다. “후크선장, 일어나!” 아…, 일어나야 하나. 눈을 조금 더 떠보니, 저쪽에서 작은아이가 장난감 야구방망이를 들고 걸어오고 있다. 이제 제법 걷는 게 익숙해지니 형이 하는 건 죄다 따라한다. 가만히 누워있었다간 칼과 야구방망이로 몽둥이세례를 받을 판이다.

 

할 수 없이 일어나 아이가 망가뜨린 ‘스페어 칼’을 들고 상대를 한다. “얍! 얍! 얍!” 날아드는 칼과 몽둥이에 얻어맞지 않으려면 건성으로 하면 안 된다. 작은아이의 방망이질은 아직 그리 대단할 게 없지만, 큰아이는 제법 약점을 찾아낸다. “이야~~~”하고 달려들며 서있는 아빠의 다리를 노린다. “얍! 얍!” 다리를 막기가 쉽지 않아 눈높이를 맞추려고 바닥에 앉았다. 그러자 제대로 돌지 못하는 걸 알고는 등 뒤를 노린다. 안 되겠다. 쓰러져야겠다. “으아악!”

 

그러나 그냥 쓰러지면 아이는 “안 되겠어! 후크선장, 다시 일어나!”라며 또다시 혹독한 훈련을 시킨다. 아! 이럴 땐 아이에게 묻는 수밖에 없다. “넌 누구냐!” “난 피터팬이다!” “얜 누구냐!” “얘는 수퍼맨이다!” 큰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언맨, 피터팬, 스파이더맨을 주로 맡고, 그보다 조금 덜 좋아하는 수퍼맨과 배트맨은 동생에게 기회를 준다. 내가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은 여기에 있다. “수퍼맨, 도와줘!” 그리고 수퍼맨, 곧 작은아이를 번쩍 들어올리면 칼싸움은 대충 마무리가 된다. 각본상, 수퍼맨이 후크선장을 구해줬다는 ‘리얼리티’가 성립했기 때문이다.

 

놀이에서의 리얼리티는 상상력을 북돋아준다. 한편으로는 상상했던 대로 현실이 이뤄지는지를 가늠해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현실을 기반으로 또다른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나도 어릴 적엔 장롱에서 분홍색 보자기를 꺼내 망토처럼 두르고는 원탁의 기사라며 동네를 누비고 다녔다. 마땅히 호응해주는 사람이 없을 땐 멀쩡히 서있는 나무나 전봇대에 대고 막대기질도 참 많이 했다. 그때 나무와 전봇대 때문에 내 상상력이 요 모양인가 하는 생각에 ‘기왕 하는 거’라며 각오를 다진다. “덤벼라, 피터팬!”


** 이 글은 월간 육아잡지 <맘&앙팡>(디자인하우스) 2013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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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외현 기자
아이 둘의 아빠인 <한겨레21> 기자. 21세기 인류에게 육아는 남녀 공통의 과제라고 믿는다. 육아휴직 등으로 나름 노력해봤지만 역시 혼자 가능한 일은 아니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하나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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