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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음식 준비를 돕는 딸아이의 모습.

  곁에서 어른이 지켜보지 않으면 불안하던 6,7살 무렵의 왼쪽 사진에 비해

  이제 혼자서 호박전을 부칠 만큼 진화(?)한 11살의 오른쪽 사진>

 

 

 

일본은 추석을 양력으로 지내는 탓에 한국과는 달리

이번주도 그냥 평범한 평일이라 명절 기분이 잘 나지 않는다.

한국에서 지내는 추석 날짜에 맞추려면 일하느라 다들 바쁘다 보니 조금 이르긴 하지만,

주말에 우리집에서 가깝게 지내는 한국인 가족과 추석 음식을 나눠먹기로 했다.

 

밥과 국, 고기, 생선, 잡채, 나물과 전 ...

늘 명절 상차림을 준비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맛있게 만드는 것까진 욕심을 접더라도,

내 나라의 음식을 좀만 더 다양하게 여러가지 만들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아직 둘째가 어리니까, 내년엔 잘 안 만들던 새로운 음식도 시도해 봐야지,

하면서 다음으로 미루는데 막상 그때가 돌아오면, 또  '그 나물에 그 밥'이 되어버리고 만다.

한번씩 한국으로 친정나들이를 할 때, 이번에는 기필코 엄마께 00음식을 배워오겠어!

하고 마음먹고 갔다가 빠듯한 일정에 쫒겨서, 아이들 돌보느라 정신없다는 이유로

제대로 실현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 요리실력은 결혼 전까지 집에서 어른들 부엌일을 대충 도우면서 익힌 게 전부였다.

그 중에서도 그나마 열심히 익힐 수 있었던 시기는 대부분 명절 음식을 준비할 때였던 것 같다.

요리에 뒤숭한 사람의 손이라도 빌려야 할만큼,

한국의 명절 음식은 손이 많이 가고 준비해야 할 종류도 많기 때문이다.

결혼 이후 쭉 외국에서 살림을 살다보니,

어린 시절부터 명절 때마다 좀 더 확실하게, 제대로, 한국음식 만들기를 익혀두었다면

그게 살면서 큰 자산이 되었을텐데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해마다 주기적으로 돌아오니 반복해서 연습할 수 있는데다

어른들의 오랜 경험과 이야기를 들으며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요리를 배울 수 있는 때가

바로 명절이다.

더구나, 명절 음식들은 한국이란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요리가 모두 모여있으니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배워두면,

어른이 되어 세계 어디를 가서도 써먹을 수 있는 훌륭한 무기이자 자산이 될 뿐 아니라

한국 음식이 간절해 질 때, 스스로 원하는 대로 만들어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한국 음식의 문화가 얼마나 깊고 다양한데,

내가 만들어 먹이는 늘 똑같은 패턴의 음식이 한국음식의 전부라고 알고 있을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참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다.

 

그래서 올해부턴 명절에는 한국 음식을 하나씩 제대로 가르쳐 볼까 하고  마음먹었다.

딸이건 아들이건,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부엌일을 많이 하게 하긴 했지만

가장 쉬운 요리의 한 부분을 맡기거나 그것도 놀이에 가까운 적이 더 많았다.

채소를 다듬고 씻거나, 냄비에 재료를 넣고 볶거나 하는 식으로.

근데 큰아이가 이제 4학년이니, 쉬운 음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게 해보기로 했다.

마침 아이가 좋아하는 손님이 올 예정이라 동기유발도 쉽게 되었다.

 

내가 잡채를 만드는 동안, 딸아이에게 맡긴 음식은 <호박전>.

쉽고 간단한 요리지만 혼자 여러가지 음식을 준비해야하는 엄마에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좀 지루한 메뉴라 아이에게 한번 맡겨보았다.

일정한 크기로 애호박을 썰고 - 밀가루와 달걀 옷을 입히고 - 달군 후라이팬에 굽기.

아이와 요리를 하며 늘 느끼는 거지만,

이 단순한 요리 하나에도 참 많은 감각훈련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재료와 열이 만나는 순간 나는 소리와 서서히 익으면서 나는 냄새,

익으면서 색이 변하는 걸 지켜보며 적절한 타이밍에 전을 뒤집는 손동작,

그러면서 뜨거운 후라이팬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해야하니 집중력도 필요하고

적당한 온도에서 느긋하게 많은 양의 전을 구워야 하니, 인내심도 필요하고...

처음엔 좀 허둥지둥하다가 조금 하다보니 스스로 요령을 터득했는지

부엌 벽에 걸어둔 CD플레이어에 지브리 에니메이션 주제곡을 모은 CD를 가져와 넣더니

BGM까지 여유있게 즐기며 호박전을 부치고 있었다.

헐~  요즘 애들은 뭐든지 참 적응도 빨라요.

 

무엇보다 이 모든게 별 잔소리없이 가능해질 만큼, 아이가 자랐다는 게

새삼스러울 만치 신기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딸아이가 나중에 커서 어느 나라에서 생활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곳이 한국이든 일본이든 또 다른 어떤 나라든

기본적인 한국 음식 정도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익숙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기를 바래왔다.

 

이제 겨우 호박전 하나지만, 내년 초 설날에 또 한 가지 업뎃하고,

다음 추석에 또 하나 더, 그 다음 설날에도 ...

명절음식만들기는 어른들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반복해서 배울 수 있다는 점, 생활과 밀착되어 있다는 점, 자국의 문화와 지혜를

가장 익숙한 사람들과 환경에서 익힐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적인 요소가 너무 많은 기회인 것 같다.

 

한국 주부들에겐 명절 후유증과 폭풍부엌노동으로 힘든 시기일지도 모르지만,

나의 어린 시절을 해마다 정갈하고 풍성한 음식으로 둘러쌓일 수 있도록 해주신

할머니, 친정엄마, 큰엄마, 작은엄마, 고모, 이모 ...

모두모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그 정성과 따뜻함이 저의 오랜 타향살이를 꿋꿋하게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 큰 사랑과 노동의 소중함, 잊지않고 가르치겠습니다.

11살 딸아이가 만든 호박전,

아직 어설프지만 열심히 하다보면 해마다 조금씩 나아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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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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